더아프로 포커스

지역사회와 상생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드는 극단 2012-12-18

지역사회와 상생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드는 극단
[집중조명]한영 커넥션 사업 영국 방문 리서치 기관 리뷰1(NIE, Graeae)


영국에서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궂은 날씨가 일본에 오니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주간의 화끈한 일정에 발바닥에 불이 났는지 나의 왼쪽 신발엔 구멍이 나 있었다. 발은 젖고 몸은 피곤해도 예정일을 맞은 아내가 나 없는 사이 우리의 첫 애를 냉큼 낳아버리지 않은 사실에 무척이나 감사했다. 이로써 보름간 영국에서의 한영커넥션 프로그램이 무사히 끝났다. 내 왼쪽 신발이 증언하듯이 프로그램은 무척이나 보람찼으며, 내 아내의 거대한 배가 보여주듯이 나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한숨 자고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한국에 ’지역사회와 상생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드는 즐거운 다국적 상업극단’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고이고이 준비해온 목표를 이번 리서치 주제로 삼았다. 감사하게도 예술경영지원센터와 영국 문화원의 탁월한 식견과 그보다 더 너그러운 마음씨 덕분에 내 리서치 주제가 선정되었다. 외모가 선정의 기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지만 부끄러워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영국 내 참관 기관도 희망한 대로 이루어졌다. ’즐거운 다국적 극단’에 대한 것은 엔아이이(NIE)를 만나 배우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드는 극단’에 대한 부분은 그라이아이(Graeae)를 만나 채워 보려 한다. 모든 참가자와 함께했던 일주일간의 영국 공연예술 전반의 신진예술가 육성제도에 대한 리서치에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기에는 우리가 가진 시간과 지면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아 이 자리에선 개인적으로 참관했던 극단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Graeae의 The reasons to be cheerful ©Patrick Baldwin

’오해는 최초의 이해보다도 더욱 지적이다’(슬라보예 지젝)

이름에서 동유럽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어느 인터뷰에서의 문장 만큼 엔아이이(NIE)의 특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을 것 같다. 엔아이이(NIE)는 뉴 인터내셔널 인카운터(New International Encounter)의 약자로 체코의 작은 도시 므세노(Mseno)에서 2001년 출발한 극단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극단은 유럽 오개국의 공연예술가들의 다국적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십년이 흐른 지금은 노르웨이와 영국에 두 개의 독립된 사무실을 두고 유럽전역의 서른여섯 명의 배우와 함께 꾸준히 투어를 돌며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들 작업의 독창적인 부분은 다국적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최대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오해와 의외의 전개들이 그들 공연의 지적이며 풍부한 동기가 된다.
런던에서 세 시간을 기차로 달려 도착한 브리스톨에선 엔아이이(NIE)의 크리스마스 공연, <헨젤과 그레텔>의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브리스톨의 오래된 돌길 위에 거세게 비가 내리는 날, 젖은 양말과 하필이면 그날 구멍이 나버린 신발을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자 리허설이 시작됐다. <헨젤과 그레텔>은 일 년 전 케임브리지에서 초연되었다. 가족극으로 만들어진 공연으로 가디언지의 평론가 린 가드너(Lyn Gardner)를 비롯한 평단으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극장을 들어서면 관객들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 작은 숲 속 공터 같은 무대에 다다른다. 이어 다섯 명의 배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등장한다. ’옛날, 옛날 어느 멀고 먼 나라에’ 배우들이 네 가지 서로 다른 언어로 이 마법과도 같은 주문을 외치면 관객들은 어느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Graeae ©Alison Baskerville

배우들 전원이 각종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라이브 음악이 무대 위의 중심언어로 사용되는 면에서는 영국의 또 다른 주목받는 극단 니하이(Kneehigh)와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배우 개개인이 극중인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러로서 극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관객과 소통하는 면에는 자크 르콕(Jacques Lecoq)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하는 다른 여러 피지컬 시어터(Physical Theatre) 극단들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NIE의 독특한 점은 다국어를 사용한다는 무대 위의 특이성뿐 아니라 무대 뒤에서 그들이 이야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전작 <바다여행 이야기(Tales from a sea journey)>는 공연팀 전원이 한 달간 컨테이너 선박을 타고 대양을 가로지르며 서로 모아온 바다에 얽힌 이야기들을 배 위에서 나누고 발전시켰다. <도심 이야기(Tales from the middle of the town)>에서는 일 년간 피터보로(Peterborough) 지역 학교를 돌며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발전시킨 극을 그들의 익숙한 생활공간인 상점과 거리에서 상연했다. 또한, 내년엔 북극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북, 북, 북 (North, North, North)> 라는 작품을 위해서는 북극에서 가까운 도시, 스발바르(Svalbard)에 머물며 리허설을 진행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그들의 이야기 개발과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공유된다. <헨젤과 그레텔>은 그러한 이야기 개발과정이 생략되었기에 그들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지만 그럼에도 엔아이이(NIE)만의 색깔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이니만큼 한국에서의 공연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리허설은 끝났지만, 여전히 거리는 젖어 있었다. 젖은 발을 이끌고 다시 런던행 기차에 올랐다. 이제 런던에서의 마지막 참관 기관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NIE의<헨젤과 그레텔> ©NIE

예술분야에서의 사회적 장애 걷어내는 눈, ’그라이아이(Graeae)’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의학적 장애’와 ’사회적 장애’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 여기 계단이 있고 그 아래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의학적 관점으로는 그가 일어나 계단을 오를 수 없으므로 그는 장애인이다.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계단 옆에 휠체어가 오를 수 있는 경사를 설치해보자. 그럼 우리의 주인공도 어려움 없이 계단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어디에도 ’장애’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다. 이번엔 다시 계단의 경사를 걷어내 보자. 계단이 있고 그 아래는 휠체어를 탄 주인공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지금 장애인이다. 사회가 경사를 걷어냄으로써 그의 접근성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적 장애라는 관점이다.

런던에 돌아와 함께한 극단은 활발한 활동에 비해 한국엔 아직 생소한 이름의 그라이아이(Graeae)였다. 그라이아이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그라이아이 세 자매는 하나의 눈을 셋이 돌려쓰면서도 불편 없이 예언업에 종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물리치고자 그녀들의 눈을 빌려 간다. 세상의 대다수 힘센 인물들이 그렇듯이 그는 돌려주기로 약속한 자매들의 눈을 꿀꺽한다(진짜 먹지는 않았다). 이제 자매들은 졸지에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안고 살게 되었다. 신화를 차용한 그라이아이 극단의 이름은 이처럼 사회적 장애에 대한 은유이다. 그들의 이름은 생소할지라도 생각보다 많은 분이 그들의 작품을 만나보았을 것으로 믿는다. 만일 지난여름 스티븐 호킹 박사와 이름도 최첨단스러운 힉스 입자, 그리고 거대한 앨리슨 래퍼의 동상이 등장한 런던 패럴림픽의 개막식을 보신 분들이라면 이미 그라이아이를 만난 셈이기 때문이다. 그 개막식의 연출가가 제니 실리(Jenny Sealey), 바로 그라이아이의 현 예술감독이다. 개막식 무대 중앙에서 화끈한 음악을 선보이는 밴드는 그라이아이의 가장 최근작이자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인 <리즌스 투 비 치어풀(Reasons to be cheerful)>에 등장했던 코러스들이다. 무대 아래는 <휠즈 온 브로드웨이(Wheels on broadway)>에 등장했던 전동휠체어를 탄 댄서들이 점령했다. 이번엔 눈을 돌려 거대한 무대와 객석 경계에 열을 지어 서 있는 4미터 높이의 흔들리는 장대를 보자.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해서 이름도 ’스웨이 폴(Sway Pole, 좌우 앞뒤로 움직이는 장대)’로 불리는 이 장대 꼭대기에는 각각 코러스들이 매달려 아찔한 서커스 기술을 선보인다. 이는 그라이아이의 대표적인 야외공연 작품 <더 가든(The Garden)>으로부터 가져온 이미지다.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멋진 개막식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예술은 과학이 그렇듯 우리 삶의 영역 첨단에서 끊임없이 그 경계를 확장하는 탐험가이자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 예술가가 중심에선 극단 그라이아이는 접근성 (Accessibility)이라는 첨단에 선 선봉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첫날은 제니를 비롯한 극단의 스텝을 만나 리서치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이틀간은 극단의 부연출자(Associate Director)인 아밋 샤르마(Amit Sharma)와 함께 보냈다. 그와 함께한 첫날은 런던의 배우들을 위한 역사 깊은 학교인 ’스피치&드라마 학교(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CSSD))’에서의 접근성(Accessibility)에 대한 워크숍에 참가 했다. 게임과 대화로 조밀하게 채워진 반나절의 워크숍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연예술분야에서 사회적 장애를 걷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극단이 이처럼 지역의 교육기관과 연계해 지속적인 상호관계를 맺는 모습이 무척 건강하게 보였다. 엔아이이(NIE)의 피터보로(Peterborough)에서의 프로젝트도 그렇지만 이런 건강한 형태의 상호관계가 한국의 지역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극단이 이번 내 리서치의 목표이기도 하지 않던가.

NIE 워크숍 ©NIE
마지막 날은 운 좋게도 그라이아이의 새로운 이야기 개발 도구인 플레이 랩(Play Lab)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나절 동안의 프로그램은 뮤지션 존의 제안으로 ’인생을 바꾼 음악’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졌다. 작가, 뮤지션, 배우들로 이루어진 참가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고 즉흥극을 통해 이야기를 발전시켜보았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밋이 줄곧 강조하던 점은 이 프로그램이 단지 새로 공연할 이야기를 찾는 것이 아닌, 새로운 공연의 형태를 찾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단지 한나절 만에도 거칠지만 꽤 멋진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앞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새로운 공연 형태에 대해 놀며(Play) 실험(Lab)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참여했던 한나절의 아이디어가 어떤 형태의 공연으로 태어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모든 참관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계단과 휠체어를 탄 우리의 주인공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계단 옆에 경사를 만드는 수고를 들여야 할까? 나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인권운동이 궁극적으로 이루어낸 성과에 주목해보고 싶다. 인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경제학의 일장일절의 원칙 말이다. 불쌍해서 베푸는 일이 아니다. 작은 사회적 노력으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 좀 더 행복해진다. 선진국이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서 인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앞서야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그라이아이가 공연예술을 통해 우아하게 싸워나가고 있는 접근성(Accessibility)이라는 최전선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니, 거창한 이유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그들의 공연은 주목받을 만큼 재미있다. 가까운 시일에 그들의 우아하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공연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소개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물론, 언제든 힘을 보탤 것이다.

NIE 워크숍 진행 중인 예술감독 Alex Byerne ©NIE
구멍 난 신발은 버렸고 젖은 발은 이제 뽀송뽀송해졌다. 영국에서의 프로그램은 많은 숙제를 남겼지만 일단 첫 문단을 끝낸 기분이다. 아내는 삼일을 꼬박 진통한 끝에 건강한 딸아이를 낳았다. 한 뼘도 안 되는 오 센티미터를 건너기 위해 아이와 엄마가 쏟은 노력은 곁에서 보기에도 성스러운 것이었다. 쌔근쌔근 잠든 둘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고작 비행기로 열두 시간 건너편에 있는 영국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진다. 누군가 혹은 내가 세상 어느 위에서 만들어 나갈 새로운 공연들이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좀 더 활짝 열어주길 기원해본다.
  • 기고자

  • 강윤수_극단 케이크트리 시어터 컴파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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