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을 다르게 담아내는 축제
[집중조명] 파리여름축제(Paris Quartier d’Été)
파리 시민 대부분이 휴가를 떠난 파리의 여름 풍경은 대체로 한가롭고 여유롭다. 주요 관광지에서 한 블록만 살짝 벗어나도 파리의 텅 빈 거리를 바로 체감할 수 있는데, 이 시기가 되면 주요 극장들도 잠시 문을 닫는다. 9월에 첫 시즌을 시작해 다음 해 7월까지 연간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극장이 이때 휴식기를 가지며 프로그램을 정비하고, 극장 시설의 보수•점검을 하기 때문이다. <파리여름축제(Paris Quartier d’Été)>는 이렇게 텅 비어버린 도시의 멈춰버린 극장을 대신하기 위해 1990년에 시작된 공연예술축제이다. 이제는 무엇도 이 축제를 대신할 수 없을 만큼 개성이 강한 파리의 대표 여름 축제가 되었다. 올해로 26회째를 맞는 이 축제는 매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약 한 달간 야외 및 실내 공간에서 다양하게 개최된다. 올해는 7월 14일부터 8월 9일까지 총 27일간 18개 작품이 파리와 파리근교의 41개 장소에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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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여름축제 2015 포스터 |
예술가와 관객에게, 규정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다
파리여름축제에는 늘 ‘Atypique(비정형적인)’, ‘décalé(주변인)’ 같은 수식어가 뒤따른다. 축제 프로그램이 일정한 특징이나 장르의 제한 없이 구성되고, 그중에서도 장르의 경계에 놓였거나 장르 간 융합을 이룬,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예술가들의 공연을 앞세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공연들이 완전히 새롭다거나 전에 없던 기상천외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들이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거의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역시 파리여름축제는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중견 및 신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개했다. 안무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1981년작 <Violin Phase>, 현대 포스트 드라마 시어터를 대표하는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장소특정공연 <Remote Paris>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은 물론, 로봇의 메커니즘을 무대 위에 구현시킨 비주얼 시어터 연출가 오렐리앙 보리(Aurélien Bory)의 <Sans Objet>, 최근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곡예사이자 현대무용수인 요안 부르주아(Yoann Bourgeois)의 초기작 <Leaving Room>과 <Cavale> 등 신진예술가의 작품도 비중 있게 소개되었다. 파리여름축제는 이들이 새로운 형식을 시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교하게 그 형식을 완성하고 발전시켰다는 점, 그래서 다른 것으로는 대체 불가능하다는 점을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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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안 부르주아의 <Cavale> | Inbox (Soralino) |
올해는 프랑스, 미국,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이스라엘, 한국 등 여러 국가의 작품이 축제에 초청되었고, 공연의 장르 또한 연극, 현대무용, 장소특정공연, 신체극, 퍼포먼스, 곡예, 콘서트, 사운드아트 등으로 다양하게 프로그래밍 되었다. 주목할 점은, 파리여름축제가 관객에게 공연 장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공표한 점이다. 파리여름축제의 예술감독 파트리스 마티네(Patrice Martinet)에 따르면, 참여 예술가들 스스로 자신들의 장르가 ‘현대무용’이나 ‘서커스’, ‘연극’ 등으로 규정되지 않기를 요청해왔고, 축제 측에서도 이들의 장르에 관해 규정하는 것이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일일 정도로 그 경계가 모호하고, 장르의 접점이 다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축제는 이들 단체나 혹은 공연의 고유한 정체성을 여러 표현으로 표기하여 호기심을 유발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선택한 단어나 문장이 제목만으로는 잘 가늠할 수 없었던 공연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가 모래 바닥 위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춤으로 꽃문양을 그려내는 공연 <Violin Phase>에는 ‘Rosas et rosaces(로사스와 꽃문양)’로, 관객들이 오디오에 따라 파리의 2개 구역을 이동하는 리미니 프로토콜의 <Remote Paris>는 ‘Court Circuit(짧은 일주)’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프로덕션 캄포(CAMPO)의 <A Coming Community>에는 ‘A Poils(벌거숭이들)’로 표기한 것이다. 흥미롭지만 불친절한 이 분류가 가능한 것은, 바로 파리여름축제의 정체성 자체가 불친절함 혹은 비정형(非定型)성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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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미니 프로토콜의<Remote Paris>©Dailymotion | 리미니 프로토콜의<Remote Paris>©expender film |
파리여름축제의 역사와 숫자가 의미하는 것들
파리여름축제는 1990년에 현재 예술감독인 파트리스 마티네의 주도로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랑(Jack Lang)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처음 개최되었다. 1990년대에 프랑스 문화부는 ‘문화다양성’이라는 키워드 아래 문화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사업을 주도했는데, 파리예술축제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이 문화 정책과 잘 부합한 것이 축제를 성장시키는 좋은 발판이 되었다. 축제는 개최 첫해인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년 동안 연간 평균 약 80만 유로(약 10억 원)의 문화부 지원금만으로 운영되었고, 이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현재는 축제의 전체 예산인 약 180만(약 23억 원) 유로 중 문화부에서 약 47만 유로를 직접 지원받고, 파리시와 일드프랑스 지자체에서 각각 약 80만 유로와 약 7만5천 유로를 지원받아 운영되고 있다.
물론, 파리여름축제가 1990년대 문화부의 주요 정책 키워드를 등에 업고 성장해온 것만은 아니다. 애초에 파리여름축제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극장이 휴식기를 갖는 여름에 다양하고 국제적인 예술작품을 다시 소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여름휴가 기간에 파리를 떠나지 않는 시민들과 파리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이동하지 않는 휴가(Voyage Immobile)’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공연 및 축제가 피해간다는 ‘여름휴가’를 대표하는 고유한 축제를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에 이 시기를 겨냥한 여러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파리여름축제만이 살아남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더불어 파리여름축제는 프로그램 중 60%에 달하는 공연을 관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면서 축제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파리여름축제는 문화부뿐만 아니라 파리시의 지원을 받으면서 규모를 조금씩 키워왔고, 1999년부터 일드프랑스의 지원을 추가로 받으면서 파리뿐 아니라 파리근교로까지 무대를 확장하게 되었다. 전체 예산 중 70% 가까운 금액을 정부와 지자체에서 받는 만큼 축제는 공공성과 대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함께 구성하고 있다. 올해도 파리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튈르리 정원(Tuileries Garden)에 야외무대를 설치해 무용, 곡예, 음악 등의 공연을 올렸다. 야외 공연의 경우, 같은 공연을 파리근교 주요 공원들에서도 볼 수 있도록 분산시켜 관객들의 접근성을 넓혔다. 유료 공연의 경우, 극장과 미술관 등에서 이뤄졌는데, 대중성이 높은 극장이나 미술관보다는 낯설고 이색적인 공간을 다수 포함하여 관객들에게 파리의 새로운 공간을 소개하는 역할까지 자처했다.
매년 평균 10만 명이 찾는다는 파리여름축제는 올해도 성공적으로 축제를 치러냈다. 텅 빈 파리 시내와 대조될 만큼 축제가 열리는 극장과 공원에는 객석마다 관객이 가득했다. 2009년에 파리8대학에서 실시한 파리여름축제의 관객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문 대상의 60%가 매년 파리여름축제를 정기적으로 찾는다고 대답했고, 축제를 찾는 사람들의 2/3가 파리여름축제가 자신들의 여름휴가 시즌의 고정 이벤트라고 답하거나 파리를 벗어나 휴가를 가더라도 축제 기간을 피한다고 대답했다. 설문조사를 주도한 필립 앙리(Philippe Henry)는 설문 응답자의 다수가 파리의 극장이 문을 닫는 여름 휴가기간 동안 양질의 공연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축제를 찾는다고 답했으며, 그 때문에 다수의 관객이 보다 쉽게 축제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축제의 근본적인 성공 요인에 대해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파리여름축제는 애초 설립 목적이었던 ‘극장이 문을 닫는 여름휴가시기에, 다양한 예술작품을 소개하는, 독보적인 여름축제를 만든다.’를 진즉에 이뤄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이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목적을 이뤄낸 그다음, 그러니까 ‘지금’의 축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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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urs (Idan Sharabi&Dancers) 튈르리정원에서 | 손도르고 관객석 ©Gregory Sabadel |
비정형성을 보호하는 철저하고 공평한 원칙
파리여름축제는 현재 ‘특이성’, ‘비정형성’, ‘비논리성’, ‘다양성’ 등을 축제의 키워드로 내세우며 공연을 프로그래밍하고 매년 새로운 공연 형식과 신예 예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올해 프로그램만 살펴보더라도 18개 작품 중 중첩되는 장르가 거의 없고, 순수장르로만 따지자면 2~3개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장르의 경계에 걸쳐 있거나 혹은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파리여름축제의 공연들이 현대공연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한다거나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각각의 작품들이 공연예술 씬(Scene)에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창조해냈느냐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파리여름축제는 공연예술의 경향이나 현상보다는 각각의 고유성 혹은 대체불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축제가 지나오면서 파리여름축제는 자연스레 매년 이 유별난 공연들을 담아내는 방법들을 새롭게 찾아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축제 자체도 형태를 가늠할 수 없게 되어 ‘비정형적인’ 혹은 ‘비논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는 축제가 내세우는 축제 고유의 정체성일 뿐, 축제가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기본 철학이나 경영 방식은 매우 원칙적이면서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매년 무료 공연과 유료 공연의 비율을 6:4 정도로 유지하는데, 이는 야외 공연과 실내 공연의 비율과 거의 동일하다. 보다 대중적인 중견예술가와 실험적이거나 인지도가 약한 신예 예술가의 참여 비율도 매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공연 장소의 경우, 파리 시내와 근교에 공연을 고루 분포하여 지역 간 격차를 줄이고, 실내 공연의 경우에는 이미 유명하거나 대중적인 장소를 제외하고 매년 파리 시내의 낯설고 새로운 장소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암묵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감수하게 하는 대신,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제공한다는 확신이 느껴지는 건 아마 마냥 근거 없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런 태도야말로 파리여름축제가 공공미션과 축제의 근본적인 미션을 해결해나가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결국, 철저하게 공평한 논리로 운영되고 있는 이 축제 안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것은 작품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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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s Objet (Aurelien Bory) ©Andrea Mohin | 종이접기 (Satchie Noro&Sylvain Ohl) ©Laurent Philippe |
파리여름축제가 대중적인 작품과 전위적인 작품을 동시에 소개하면서, 도저히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낼 수 없는 국내외 다양한 예술가들을 무대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여름축제가 고집스럽게 지켜온 철저하고 공평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새로운 것’과 ‘다른 것’을 소개해야만 하는 축제 자체의 목적과 미션이 표면적으로는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인 상태로 드러나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매우 규칙적이고 논리적인 운영의 결과였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담아내야하기 때문에 그들을 담아내는 방법이나 그들을 대하는 태도 자체도 매년 달리한다는 것은 축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매년 같은 곳으로 휴가를 가고 싶어 하지 않듯이, 파리여름축제는 관객들에게 매번 다른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토록 오랫동안 파리의 여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파리여름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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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Festival Paris quartier d’été - Eléments de bilan (l’Université Paris VIII, encadrés par M. Philippe Henry, maître de confé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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