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으로 삶을 노래하는 소리꾼 이자람
[Who&Work] 판소리 만들기 ‘자’_이자람
|
| |
| 이자람 억척가 공연 모습 |
소리는 병풍 치고 자리 깔고 한복 곱게 차려 입고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2004년 초가을 한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와 한국 사회의 성평등 문제를 재치와 풍자로 풀어내던 이자람의 판소리는 참으로 유쾌한 충격이었다. 그때 ‘아, 이런 재주 많은 친구가 있나!’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브레히트의 <세추앙의 착한 사람>을 <사천가>라는 이름의 판소리 공연으로 만들어 무대에 오른다는 소문이 들렸다. 반신반의하며 가 본 공연에서 그가 직접 했다는 작창과 극 구성에 놀란 나는 ‘아니, 이런 아티스트가 있나!’하며 창작자로서의 재능에 놀랐었다.
<사천가>에 대한 찬사가 국경을 넘어 이어지던 2011년 초 뉴욕에서 쇼 케이스가 있었다. 판소리라는 형식도 한국어도 모두 낯설기만 할 뉴욕의 관객 앞에서 이자람은 언어의 벽이니 문화의 차이니 하는 장애들은 가볍게 뛰어넘었다. 관객을 말 그대로 쥐락펴락하며 그는 내용뿐 아니라 디테일까지 전달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타고난 광대가 있나!’ 나는 그의 재능에 전율했다. 다시 한 번 브레히트의 작품을 손에 든 그는 <억척가>를 무대에 올렸다. 전장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다 결국 자식들을 모두 잃고 마는 억척네가 되어, 산다는 것의 잔인함과 그럼에도 잃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그는 무대 위에서 표현하고 있었다. 배우로서도, 창작자로서도, 인간 이자람으로서도 훌쩍 성장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사가 너무 좋았다. 그는 이제 작가였다.
Q: 요즘 근황은 어떤가? 여름에 해외 투어를 다녀왔다고 들었다.
A : 런던에 다녀왔다. 영국에 있는 한국문화원 초청으로 1회 공연을 하고 온 아주 짧은 일정이었다. 밤에 도착해서 자고 다음날 셋업 하면서 리허설 한 후 그 다음날이 바로 공연이었다. 시차 적응하고 공연하느라 거의 죽을 것 같았다. 그 후로 여름내 혼자 있는 시간을 좀 많이 가졌는데, 그러면서 ‘아 이런 게 내 인생이구나. 내 인생이 이렇게 생겼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을, 삶을, 점검하고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Q: 런던에서는 <사천가> 공연을 한 것인가? <억척가> 투어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지?
A : <억척가>는 11월 초에 예정된 프랑스 리옹이 첫 해외 공연이다. 전에 <사천가>를 공연했던 곳이기도 하다. 파리 중심의 문화편중을 해소하기 위해 리옹에 국가의 기금으로 만든 민중극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사천가> 공연을 하면서 너무 행복했었다. 4일 공연에 머무른 기간이 일주일 정도 되었다. 충분히 적응하고 충분히 극장에서 뒹굴고, 그러고 나서 무대에 올라갔더니 당연히 공연도 좋았다. 외국 관객과도 이렇게 되는구나, 더 좋게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시 중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대극장은 수리 중이었는데, 이번에 <억척가>는 대극장에서 한다.
Q: 동시대적 이슈로 판소리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 개인적으로 처음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를 만났던 것이 참으로 신선하고 유쾌한 충격이었다.
A : <구지 이야기>는 내 첫 작품이다. 대학교 시절 한 페미니스트 사이트에서 대학생들이 일기처럼 올린 사연을 보았는데, 이런 위험한 세상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겪으며 살고 있구나, 나는 너무 안전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그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하고 싶어졌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게 판소리니까. 처음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했는데 그게 너무 날 것이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걸 완전히 스위치 전환을 해보자, <이갈리아의 딸>처럼, 해서 써 본 작품이다. 뭣도 모르던 시절의 내 처녀작이다.
|
| |
| 이자람 억척가 공연 모습 |
Q: 브레히트의 작품으로 만든 <사천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A : 정동극장에서 ‘아트프런티어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아 원하는 공연을 할 기회가 생겼다. 처음에는 창작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에서 만난 인연인 연출가 남인우에게 연출을 부탁하고 쓴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거 가지곤 안 되겠다 싶은 거다. 그때 ‘희곡 세미나’, ‘극작론’ 등의 한예종 수업들을 청강하고 있었는데, ‘희곡 세미나’ 수업에서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발표를 들으면서 ‘어, 저 셴테는 날 닮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그걸 남인우 연출에게 얘기했더니 바로 ‘그거 좋다!’ 라고 하더라. 처음엔 뭐가 나올지 두렵기만 했다. 작창도 혼자 다 했는데 무섭고 자신이 없었다. 스태프들 앞에서 연습을 하는데 반응도 신통치 않은 것 같고,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연출에게 말했다. 앞부분은 판소리로만 가겠다. 다른 악기나 다른 효과 같은 것에 기대지 않겠다. 그 선택이 옳았다. 작은 승리라고나 할까. 그리고는 두산아트센터에서 그 작품을 업그레이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Q: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넘어가면서 작업 방식이나 음악적인 부분이나 다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사천가>는 첫 시도이자 실험이라는 양식상의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지는 반면, <억척가>는 브레히트의 재해석 재창조로서의 의미가 더 크게 느껴진다. 음악에 있어서도 <사천가>의 음악이 ‘아,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이렇게 우리 것과 서양의 것을 섞어도 멋있구나!’하는 느낌이었다면, <억척가>에서는 우리 음악이니 서양 음악이니 하는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선율악기와 타악기가 사건의 의미나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대단히 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구나 하는 점만이 느껴질 뿐이다.
A : <억척가>에서는 우리 모두 성장했다. 끊임없이 걷어냈다. 3명의 고수가 하나가 되도록 해 보자, 우리 모두 자기 밴드도 하고 있고 개인 작업도 다 하고 있으니, 이 작품에서는 오로지 이 작품만을 위한 것만 남기자, 그런 생각을 했다. <사천가>에 비해 <억척가>는 더 마음껏 쓴 것 같다.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무대에 대한 믿음도 생겼다. 공연히 붙이고 채우고 하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천가> 때는 작가도 아닌데 타이핑을 하고 있는 게 미안하고 창피하고 그랬다. 작창도 그렇고. 검증되지 않은 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누구에게 인지도 모르게 미안했다.
<사천가> 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고자 쓴 작품이었다면, <억척가>는 그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쓴 작품이다.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은 뭐지? 아, 난 가슴이 어쩔 줄 모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인간이 짊어진 모순들, 그런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는구나, 그래, 그렇다면 <억척어멈>이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
| |
| 이자람 억척가 공연 모습 |
Q: 첫 해외 공연이 2010년 폴란드 콘탁 페스티벌인 것으로 아는데, 최고 여배우 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반응이 어땠나?
A : 폴란드에서는 동시 통역기를 쓰더라. 관객들이 이어폰으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하랴 무대 보랴 정신이 없더라. 머리로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리액션이 없는 공연은 처음이어서 나도 무척 당황했다. 중간휴식 후 2부가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어폰을 빼더라. 그 후로는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큰 상을 받아 매우 통쾌했다. 아마 자기 집안사람이 뭘 하는지 몰라준다는 섭섭함과 서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Q: 국내외의 반응이 상당하다.
A : 관객의 반응이 가장 무섭고 또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믿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관객의 환호와 갈채에 속으면 안 된다.
Q: 그런 생각을 하다니, 대단히 현명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자신에게 너무 냉정한 것 같다.
A : 자기반성을 많이 하고 나 자신에게 엄격하려고 한다. 지금은 판소리 대본이나 작창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또한 덫이라는 것도 안다.
|
| |
| 이자람 억척가 공연 모습 |
Q: 판소리 완창, 밴드 활동, 창작 공연 등 어떻게 보면 세 가지 다른 작업을 동시에 해 나가고 있는데, 그 세 가지는 이자람에게 어떤 의미인가?
A : 완창은 지금도 계속 한다. 완창 하나를 배우고 갈고 닦아 공연을 준비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심청가> 처음으로 완창 했고, 대학교 2학년 때 <춘향가>를 완창 했다. 그리곤 한참이 지나서 타루를 그만 두었을 때 <수궁가> 완창으로 극복했다. <사천가> 공연이 끝난 후 흔들리지 않은 것도 <적벽가>를 배우고 닦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완창을 하고 싶다. <적벽가>를 서울에서 한 번 더 하고 싶기도 한데, 그런데 왠지 모르겠지만 <심청가>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이런 생각이 든 지 좀 되었는데, 아마 2년 안에는 하게 될 것 같다. <심청가>는 판소리를 시작한 시점이다. 다시 시작점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온 것 같다.
‘아마도 이자람 밴드’ 활동은 앞으로 2년 동안 집중해서 할 것이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다. 아마도 외로워서 시작한 것일 게다. 일기처럼 쓴 가사들에 곡을 붙여서 노래를 했다. 처음엔 기타 치는 친구랑 둘이 시작한 거였는데, 1년 만에 앨범을 만들고 나서 든 생각이 ‘취미로 하는 것을 돈 받고 파는 것은 안 되는 일이구나. 그렇다면 이걸 열심히 하든지 그만 두든지 해야 하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 9월부터 한 2년 정도는 밴드 활동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Q: 당분간 새로운 공연을 만들 계획은 없지만, 해외 투어는 계속 잡혀있는 것으로 아는데?
A : 투어 일정은 있다. 해외 공연은 웬만하면 놓치고 싶지 않다. 사실 물리적으로, 체력적으로 지금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공연을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건 사실이다. 마흔에는 마흔에 가능한 공연이 있겠지만 지금 하는 공연은 더 지나면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힘으로 갈 수 있는 공연을 아직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관객 만나고 싶다.












PRE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