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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플랫폼을 통한 중국 공연예술 생태계의 변화 2014-12-16

민간 플랫폼을 통한 중국 공연예술 생태계의 변화
[피플] 중국국가화극원 운영센터 센터장 푸 웨이보, 베이징청년연극제 연출가 샤오 저후이


최근 몇 년간 중국 공연계는 체제 개혁과 시장 규모의 팽창이라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산업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창작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공립 공연장과 예술 단체의 법인화, 지방 정부의 대형 공연장 건설 붐, 민간 차원의 공연 창작과 유통 활성화, 역량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출현 및 장르의 다변화 등 그 변화의 흐름은 중국 전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발표 시점에서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중국 공연계 흐름에 관한 정보들 역시 상당 부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모두가 산업의 현황과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 수익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창작 분야에서의 지각 변동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미지(未知)의 영역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소극장’, ‘민간’, ‘신진’ 이라는 몇 가지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중국국가화극원(中國國家话剧院, National Theater of China) 산하의 공연장들을 총괄 운영하고 있는 푸 웨이보(周子援, Fu Wei Bo) 극장장은 신분상으로는 국립 공연장에 몸담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소극장 연극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베이징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院, Beijing People’s Art Theater, 1952년 설립된 이래 수백 편의 현대 화극(話劇)을 무대에 올려 어찌 보면 국가화극원보다도 역사와 전통에서 중국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의 배우로 연극 인생을 시작한 그는 90년대 초 일본에서 공간 디자인을 배우고 귀국하여 인민예술극원 내 소극장 개관부터 극장 운영과 기획에 참여하게 된다. 그 후 사재를 털어 베이징 최초의 민간 소극장인 북병마사(北兵馬司, North Theater) 극장을 인수하고, 대학생 연극제, 베이징청년연극제(北京靑年戱劇節, Beijing Fringe Festival)를 차례로 만들어 당시만 해도 작품을 선보일 무대가 거의 없었던 젊은 연극인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해 왔다. 푸 극장장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연출가 샤오 저후이(Shao Ze Hui)는 대학에서 연극과는 다소 동떨어진 분야인 정보관리학을 전공하였는데, 초창기 대학생연극제를 통해서 데뷔하고 청년연극제 무대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페스티벌에도 진출하는 등 주목받는 차세대 연출가가 되었으며 이제는 청년 연극인들의 모임인 베이징청년희극공작자협회(北京靑年喜劇工作者協會, Beijing Young Dramatists Association, BYDA)의 핵심 인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중국국가화극원 전경

2013 베이징청년연극제 포스터

중국국가화극원 전경 2013 베이징청년연극제 포스터

소극장 연극의 등장과 신진 예술인들의 성장

Q(장혜원): 80년대에 이미 가오싱젠(高行健, Gao Xing Jian)의 <절대신호(绝对信号)>가 중국 최초의 소극장 연극으로 선보인 바 있었지만, 그후로도 여전히 소극장 연극이 과연 무엇인지 개념조차 모호하게 여겨지던 때가 한동안 이어졌다. 운영 측면에서 보았을 때 90년대 유학에도 돌아왔을 당시 상황으로는 인민예술극장의 소극장을 맡은 것이 사실상 모험이었을 것 같은데, 이어서 차례로 북병마사 극장과 국가화극원 산하의 동방선봉 소극장(東方先鋒, East Pioneer Theater)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A(푸 웨이보, 이하 푸) :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 당시의 중국 연극은 경극(京劇), 천극(川劇), 월극(越劇) 등의 전통극과 소위 ‘화극’이라고 하는 현대극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경우 인민예술극원이 선보이는 대단히 양식적인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중앙희극학원(中央戱劇學院, The Central Academy of Drama) 등 정통 연극 교육기관을 나와서 국가 산하의 예술 단체에 들어가지 않는 한, 민간 차원에서 창작 활동을 한다는 것을 거의 상상하기 어려웠고,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내용과 형식, 미학을 시도하는 공연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있다고 믿었기에 주류가 아닌 신진 예술가들이 발언하고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대극장 무대가 아닌 소극장 공간이 필요했고, 여기서 기초를 다지면 어떠한 양성 순환의 생태계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옛날이야기지만 예전에는 민간 극단이나 예술가 개인에게 대관 신청 자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내용에 대한 심의나 작품 질에 대한 평가 이전에 아예 이를 내보일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러한 환경이 공연예술의 발전에 있어 분명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처음에는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서지 않고 너무나 막막해서 차라리 극장 내의 도서관으로 발령이나 나서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웃음) 1995년 처음 극장 사무실 꾸미는 비용으로 1000위안을 받아서 책상 두 개와 대걸레를 사고 나니 빈손이었다.

Q : 90년대 말 소극장에서부터 시작된 실험극과 상업극의 등장과 공존, 전체 연극계 발전 단계들을 모두 목도한 증인으로서 간단히 지난 흐름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푸 : 1999년 연극 <코뿔소의 사랑(Rhinoceros in Love)>이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이 작품은 연출가 멍징 후이(孟京辉, Meng Jing Hui) 스튜디오의 대표 레퍼토리 세 작품 중 하나로 현재도 계속 공연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음악을 맡았던 장광 티엔(張廣天, Zhang Guang Tian)이 쓰고 연출한 <체 게바라>, 리리 유이(Li Liu Yi) 연출의 <비상마작(Fei Chang Ma Jiang)> 등 일련의 소극장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연극계 지형 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멍징 후이는 <코뿔소의 사랑>을 제작하기 위해 집까지 저당 잡혔으나 작품의 성공으로 15만 위안의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당시는 극장 밖으로 관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하고, 한 작품에서 얻은 수익으로 다른 작품에 투자할 수 있는 상황도 만들어졌다.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작품들이 실험과 선봉이라는 틀을 넘어서 상업적으로도 ‘시장화’를 이루며 성공과 발전의 큰 동력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 사이 북병마사 극장의 인수와 운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2005년 국가화극원 산하의 동방선봉 소극장이 개관하면서 제 2단계의 실험과 탐색이 시작되었고 젊은 창작자, 기획자, 관객 또한 유입되었다.

중국국가화극원 운영센터 센터장, 푸 웨이보

멍징 후이의 <코뿔소의 사랑> 공연포스터

중국국가화극원 운영센터 센터장, 푸 웨이보 멍징 후이의 <코뿔소의 사랑> 공연포스터

A(샤오 저후이, 이하 샤오) : 그렇다. 나를 비롯해 현재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많은 30-40대 연출가들이 그 시기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방금 언급한 공연장들과 민간 차원의 연극제가 아니었다면 희극학원 학부 출신이 아닌 나나 황잉(Huang Ying), 허판(He Fan) 등 신진 연출가들이 데뷔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린자 오화(林兆华), 리리 유이 그리고 멍징 후이 정도 이후에 차세대 예술가 특히 연출가의 부재라는 화두는 당시 모두가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이전에 공연이라는 것이 전문적인 예술 교육기관 출신의 국가 기관 소속 예술인들의 몫이었다면(배우나 연출가를 국가 1급 배우, 국가 2급 연출가 같은 식으로 등급을 매겨 관리) 전문가의 권위가 옅어지고 누구나 작품을 만들고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주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올림픽 개최 시기를 기점으로 공연장과 극장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연극계 자체가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상해 엑스포, 베이징 올림픽 때는 물론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 것이긴 하지만 2만 회차를 상회하는 공연이 올려져서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머리 아픈 일이었을 정도였으니까. 창작하는 입장에서는 그만큼 기회가 많아진 것은 맞다. 대학생연극제, 청년연극제, 소극장 우수 작품전 등 3단계에 걸친 시스템이 이제야 갖추어진 것이다.

확장된 교류와 협업, 중국 대륙을 넘어 세계로

Q : 두 분 다 각자 명함에 있는 현재의 국가 소속기관(국가화극원, 베이징이공대학 예술교육센터)에 관련된 이야기보다는 아무래도 그간 작업해 온 소극장이나 젊은 연극인들의 창작 플랫폼과 관련된 주제를 좀 더 물어야 할 것 같다. 지난 해 설립된 베이징소극장연극협회와 2007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베이징청년연극제에 대해 소개해 달라.

푸 : 협회 설립은 2012년부터 준비해오던 일이다. 작년 봄에 베이징의 민간극단, 공연장, 극작가협회 등이 참여하여 정식으로 소극장연극협회를 설립하였고, 그 해 말에 소극장 연극연맹 우수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작품전이 끝나고 바로 박람회를 열었기 때문에 참여 단체들이 짧은 시간에 증가했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는 시 문화국이 교류의 자리를 마련하는 등 역할을 하였으나 협회 자체는 순수하게 민간 연극과 소극장에 종사하는 개인이나 단체만 가입할 수 있어 독립성을 유지하게 하였다. 현재 회원은 개인과 단체를 합쳐 약 60개가 넘는데 이는 정부 산하의 극원 연맹 등이 자랑하는 1만, 2만의 숫자에 비교하면 턱없이 적지만 이들이 창작, 제작한 결과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히려 참신하고 흥미로운 작업들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성과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각 회원 간의 협업이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어서 앞으로 더욱 업계 내에서의 긍정적 교류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샤오 : 베이징청년연극제는 2008년 처음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젊은 창작자들이 설 무대는 공식적으로 대학생연극제였는데 이 친구들이 졸업을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첫 해의 영문 명칭은 Youth Theater Festival 이었으나 현재는 Fringe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국제’라는 표현은 정부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민간의 상업 공연들은 심의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아무래도 아직 기금을 받고 있고 이런저런 소소한 제약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지난 7년간 청년연극제에 참가한 작품은 중국과 해외 작품을 포함하여 326편으로, 참여한 아티스트만 해도 벌써 5500명에 달한다. 최근에는 거의 한 달간 페스티벌이 지속될 정도로 작품이 많은 편이다. 청년연극제는 아비뇽 페스티벌과 교류 협약을 맺고 2011년부터 우수작들을 내보내고 있는데 올해까지 중국 작품 15편이 아비뇽 오프에 참가하고, 역시 15편의 프랑스 작품이 중국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또한 현재 호주 애들레이드 페스티벌, 에든버러 페스티벌프린지 등과도 교류의 방식을 논의 중이다. 작품의 다양성 측면에서 본다면 최근 들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인 공연을 비롯해 사운드 시어터, 피지컬 시어터(physical theater), 뮤지컬 등 텍스트 위주의 초기 공연들에 비해 새로운 작업들을 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북경청년연극제 연출가 샤오 저후이

극단 양손프로젝트의 <개는 맹수다>

북경청년연극제 연출가 샤오 저후이 극단 양손프로젝트의 <개는 맹수다>

Q :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소극장, 동방선봉 소극장, 청년연극제의 메인 공연장인 펑차오(蜂巢, Feng Chao) 극장과 조양구문화관9개극장(Chaoyang Cultural Center Nine theater) 등 많은 소극장에서 민간 차원의 한중연극교류가 있었고, 적지 않은 수의 한국 작품을 접해보셨을 텐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무엇이었나.

푸 : 많은 작품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를 꼽기는 어렵지만, 2002년 베세토연극제(BeSeTo Theatre Festival) 참가작이었던 극단 노뜰의 <동방햄릿>을 아무래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시 내가 극장장으로 있었던 인민예술극원의 소극장에 막과 댄스 플로어(dance floor)가 모자라 다른 극장에서 빌려서 어렵게 셋업을 마치기도 했고, 관객 반응이 너무나 뜨거워 공연을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극장 밖에서 연출과 배우들이 나오기를 줄을 서서 기다렸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에 동방선봉 소극장의 개관 기념으로 초청했던 극단 죽죽의 <나의 교실>도 당시 중국 청소년들 역시 겪고 있던 입시나 왕따 등 교육 현실의 문제와 맞물려 좋은 반응을 얻었었다. 한국의 공연들이 여러 작품이 왔지만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주제와 표현 방식, 연출의 스타일들이 각 작품마다 뚜렷하게 다르고, 연출은 극단적일 정도로 섬세하고, 배우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샤오 : 연출가협회 초청으로 한국 배우들과 브레히트의 <제 3제국의 공포와 참상(Frights and Poverties of the 3rd Empire)>을 연출한 경험이 있고, 난타나 점프와 같은 넌버벌 공연부터 대학로의 연극들까지 꽤 여러 한국 작품을 본 편이다. 푸 선생님의 말씀에 특히 공감하는 부분은 배우들에 관한 얘기인데 중국에서 작업할 때에 비해 한국 배우들은 아주 몰입도도 높고 진지한 태도로 연습에 임해주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청년연극제에서 해외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극단 죽죽의 <맥베드>와 양손프로젝트의 <개는 맹수다> 등은 초청부터 중국에서의 세트 제작까지 직접 관여했는데 두 작품 모두 현재까지도 종종 현지에서 회자되고 있다. 일회성의 공연이 아닌 최소 두 작품 이상의 공연, 그리고 워크숍이나 관객 대화 등을 통해 중국 관객들이 한국 현대극의 한 부분이나마 어떠한 맥락을 가지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징이나 상해만 하더라도 해외에서 들어오는 공연들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한국 작품들은 항상 다양한 스타일과 배우들의 열정적인 모습으로 중국 동료들과 관객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극제에서 프로그래밍을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항상 초청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러한 교류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인터뷰중인 샤오 저후이(좌), 푸 웨이보(우)

인터뷰중인 샤오 저후이(좌), 푸 웨이보(우)

인터뷰중인 샤오 저후이(좌), 푸 웨이보(우)

 

민간 극단들과 젊은 창작자들은 오랜 기간 중국 공연예술계의 변방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국공립 공연예술 단체를 능가하는 창작의 활기와 규모로 점점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당 기간 문화예술이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하면서 관객들도 수동적인 상태를 놓여있었다면, 민간의 공연예술이 발전하면서 관객 역시 그들과 함께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대극장 공연들이 관(官)에서 제작 주도하는 형태이건 아니건 거품이 많이 껴 있고, 베이징인민예술극원과 같이 오랜 레퍼토리와 배우들에 대한 신뢰를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 스타 캐스팅이 아니면 공연이 10여 회를 넘기기 힘든 상황에서 이 거품을 걷어내고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바로 소극장의 민간 연극 세력과 그들이 소통하는 무대인 일련의 연극제들이라 할 수 있다. 여전히 자본과 우수한 작품에 목말라 있고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간 이 공간들과 플랫폼이 가져온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변화는 앞으로도 더욱 확장될 것이며, 중국 공연예술계를 볼 때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중국국가화극원 홈페이지


  • 기고자

  • 장혜원_국립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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