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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와이 랍, 프린지 상하이 프로그래밍 디렉터 2009-12-23

쾅 와이 랍 (Kwong Wailap ?爲立) 은 홍콩 출신으로 홍콩 중문대학을 거쳐 영국 리즈대학에서 연극연출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지난 20년간 홍콩 아트 페스티벌, 에딘버러 페스티벌, CCDC(홍콩 City Contemporary Dance Company), HKADC(홍콩 예술발전국, HK Arts Development Council), 홍콩 프린지 클럽, 마카오 컬처럴 센터 등 다수의 조직에서 페스티벌 디렉터, 프로듀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90년대 말부터 중국 대륙의 공연예술시장에 주목하고 베이징의 LDTX 무용단, 광동 상하이 공연예술발전유한공사와 손잡고 베이징과 광동에서 최초로 현대무용 페스티벌을 조직한 바 있으며, 2006년 프린지 상하이를 설립하여 상하이 프린지 페스티벌을 지속적으로 개최함과 동시에, 홍콩 시티 페스티벌 내 Creative China Series 큐레이터, ICIF(중국(심천)문화박람회 공연예술관과 광동성 주강삼각주 지역 공연장연합회의 컨설턴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Q. 당신의 이력이 상당히 다양하고 광범위해서 프로필을 다 읽고 간략히 정리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특히 반환이 됐다고는 하지만 중국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의 홍콩에서 일하다가 대륙 내부로 시선을 돌리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A. 80년대 후반 영국에서 돌아오면서 씨티 컨템포러리 댄스 컴퍼니 (CCDC) 와 홍콩 예술 발전국 (ADC) 에서 근무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반복적인 문서 작업이 많아지면서 점차 이직을 고려하게 되었다. 당시 조직 측에서는 중국 대륙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를 설득했고, 1995년 상해로 건너가 약 9개월간 홍콩 아트 페스티벌의 홍보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부터 2003년까지는 북경에서 일하게 되었다. 북경으로 옮겨온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은, 상해가 브로드웨이식의 예술도시로,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사회주의 특색의 자본주의 문화 모델이 가장 잘 구현된 곳이지만, 컨템포러리 예술이 발전할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물론 북경에서의 6년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당시 북경의 문화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서,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당시의 상해는 서양문화에 지나치게 경도돼 있고, 북경은 오히려 외국문화를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에서는, 우선 홍콩에 비해 맞닥뜨리는 관객들이 양적으로 천 배는 되는 수준이었고,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그 반향의 규모 역시 대단했다. 홍콩에서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업계 종사자들이고, 반응 역시 비교적 냉담한 데 반해, 대륙의 관객들은 이메일, 편지, 관극평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공연에 참여하려는 성향이 있고, 매체와 협력하여 특정 주제에 대하여 심도 있게 토론할 수 있는 지면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 지 모르지만, 홍콩에서는 소비문화 외에 문화사업, 특히 공연예술 쪽에서는 안정적인 일자리(발전국 등)라는 측면을 제외하고 특별히 매력적이거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륙에서는 현재 문화예술 분야에서 (특히 민간) 여러 가지 지원 제도가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입장수익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고, 자의든 타의든 적극적으로 생존의 방식을 모색하고 고민한다. 이에 비해, 홍콩은 맹목적으로 지원금과 각종 보조에만 기대어, 자생능력을 키우거나 예술가나 예술행정인력들에게 보다 장기적으로 큰 시야를 제공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화정책상에서 가장 큰 실패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Q. 그간 당신이 겪은 중국의 문화예술 생태와 환경은 어떠한가?

A. 굉장한 악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륙의 예술가들은 홍콩정부의 지원을 부러워하지만, 내가 보기엔 양 쪽 다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있는 것 같다. 홍콩의 어려움이라면 관객 부재와 지원금 분배의 문제가 있다. 각 단체가 지원금을 받으면 매 구성원들에게 동일하게 분배를 하고, 남는 부분을 공동의 기금으로 사용하는데, 상대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드물지만, 예술발전 양상도 내향적이고 소극적이다. 이에 비해, 대륙에서는 공연수익이 나지 않으면 예술가로서의 생명이 사망선고를 받기도 하지만, 또 어떤 공연은 수억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 경제적 성공이 비슷한 류의 상업 공연을 대량 양산해 내는 등의 문제점이 따르기도 한다. 각자가 처한 환경이 모두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외지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는 제작자나 투자자들도 많아졌는데, 나의 경험상으로는 협력작업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나 계산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륙의 아티스트들은 작업에 굉장히 민감하고,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여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국 전통극의 경우 생존을 위해 스타 배우를 키우고 포장하는 노력을 한다. 이 ‘포장’의 범위라는 것은 배우에 그치지 않고, 극장, 작품, 관객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홍콩 극단의 경우 이러한 부분이 취약하다.
또 수익이 난 이후에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여 발전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데, 예를 들어 연출가 멍징후이(孟京輝)의 경우 끊임없이 히트작을 재공연하여 재원을 확보하고, 그와 동시에 실험성이 짙은 작품도 하고 있다. 이렇듯 각자의 시스템이 가진 장점과 단점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와 참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Q. 홍콩 예술계에서의 경험이 중국의 문화예술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A. 관리의 측면 등 일정 부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대우나 인식의 문제로 홍콩에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전문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륙에서 이쪽 업계에 종사하는 것이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륙에서는 모든 업종이 똑 같은 비즈니스이고, 문화예술 분야라고 해서 아무도 멸종위기의 동물처럼 보호해주지 않는다.

 

Q. 2003년에는 상대적으로 문화예술보다는 무역이나 공업 등 개발도시의 이미지가 강한 광동 지역에 진출하였는데 그 배경은 무엇인가? 또, 홍콩 공연단체의 작품들이 광동에서 특히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A. 실은 북경에서 계속 있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중국의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라면 누구든 북경에서 일하고 싶어할 것이다. 일단 북경은 관객수라든가 문화적 수준, 이 분야에 대한 매체들의 관심도 등 모든 면에서 전국 최고인데다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당시 (1996년에서 2003년) 내가 무용이 아닌 연극 쪽을 택했더라면 지금쯤 북경에서 크게 성공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대 무용 분야에서는 방해나 비상식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는데, 예를 들면 돈 벌자고 왔느냐는 질문에 시달리거나 혹은 끊임없이 새로운 법규가 출현해 돈을 내놓으라거나 식이었다. 내가 떠나던 2003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컨템포러리 예술 활동에도 변화가 왔고, 개인이나 해방을 강조한 작품들이 생겨났다. 물론 유학경험이 있는 적지 않은 수의 관료들이 문화부에 포진해있었지만 이전에는 감히 이러한 예술을 할 생각을 못했던 것뿐이다.
올림픽 유치 성공과 사스 파동을 겪은 후 중앙정부에서도 어떤 일들은 무조건 막는다고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듯 하다. 올림픽은 전세계에 중국이 자유롭고 개방된 나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2003년 사스 때문에 정부에서 이미 예정돼 있던 많은 문화예술 활동을 중단시킨 영향도 있고, 나 개인적으로는 CCDC를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광동지역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실 광동성의 문화는 홍콩과 지극히 유사한 점이 많다. 당시의 광동은 마치 70년대 홍콩처럼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문화사막과도 같았다. 현대극은 물론 현대무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각 시(市)급 공연단체들이 동일한 레퍼토리를 가끔 올리는 것이 전부일 정도여서 더 부딪쳐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북경이나 상해의 단체들도 광동에 와서 공연을 하긴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같은 광동문화권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홍콩의 작품들이 더 사랑 받는 것 같다. 내가 늘 말해온 것처럼, 홍콩연극의 제1의 출로는 광동성이다.


 

Q. 이제 프린지 상하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중국에서 프린지 페스티벌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A.
프린지 페스티벌은 일반적으로 자유롭고 실험적인 예술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민간 예술인들의 조직으로, 비주류 예술과 신진 아티스트들에게 하나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1947년 에딘버러에서 시작된 페스티벌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40여 개가 넘는 도시에서 열리고 있다. 홍콩의 프린지 페스티벌은 대략 1985년, 1986년 무렵 시작되었는데 중화권에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싱가포르 프린지에 이어, 중국 대륙에서는 2006년 상해에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Q. 프린지 상하이는 어떤 곳으로부터 지원을 받나? 중국정부의 지원금은 오히려 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축제를 진행하는데 다른 어려운 점은 없는가?

A. 정부의 지원이 많을수록 간섭도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최대한 다른 루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프린지 상하이와 Cultural Links Management Consulting. 이라는 회사는 실은 같은 조직이다.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구성원들은 Cultural Links 의 이름으로 브랜드 컨설팅, 엑스포 관련 행사, 상업성 이벤트 등 소위 수익사업 또한 하고 있다. 이런 수익을 바탕으로 프린지 페스티벌을 비롯, Fringe on Campus 등 적자일 수 밖에 없는 기획도 할 수 있는 것이다. Fringe on Campus의 올해 주제는 “Music is for everyone”으로 상해의 12곳의 중고등학교와 대학가를 찾아가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또한 지금껏 자비로 페스티벌에 참가해온 폴란드의 예술가들도 우리의 주요한 후원자이다. 초창기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축제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캐나다 정부와 기업, 각국의 주중 영사관 또한 자국 아티스트들의 참여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상해 드라마아트센터의 경우는 공연장을 제공함으로써 큰 짐을 덜어주고 있으며, 학생티켓의 경우 일부 기업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금액 자체는 많지 않지만 최근 후원 의사를 밝히는 기업들이 많아져서 기쁘게 생각한다. 꼭 금전적인 후원이 아니더라도 많은 상해 현지 아티스트들이 전화를 통해 격려를 해주곤 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된다.
어려운 점은 물론 많은데, 우선 첫 해 행사 당시, ‘최초’라는 것에서 오는 힘든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행사가 어떤 성격과 방향을 갖고 있는지를 증명할 선례가 없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심의과정이 자연 까다로울 수 밖에 없었고, 예산 부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참가 단체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조정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Q. 그렇다면 심의 문제로 중국 사정에 맞게 고쳐야 했던 작품이 있는지?

A. 부분적인 수정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Wild Flower at the End of the Road라는 현대 무용은 나신이 포함돼 있어서 수정을 거쳤고, 일부 전시 작품 중에서도 노출이 있는 것들은 빼야 했다. 되도록 작품의 퀄리티와 원래의 맛을 살리는 선에서 수정하려고 노력했다.
심의는 중국에서 필수적인 과정이고, 우리 또한 합법적인 프로세스를 통과하여 프린지 활동이 합법적 문화예술 행사로 자리매김하길 원했다. 2005년 11월에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정부의 유관부문과 소통하고, 다양한 버전의 기획서와 문서, 자료를 준비하여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Q. 페스티벌에서는 어떤 장르의 작품들이 포함되나? 축제를 통하여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게 있는지?
A.
거의 모든 실험, 전위 예술의 형식을 다 포괄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연극, 현대 무용, 음악, 미디어아트, 사진, 설치미술, 회화, 디자인 등등. 그 외에도 포럼, 아티스트 토크 등 관객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참가 아티스트들과 사무국 스텝들이 현지의 예술단체나 학교, 연기자들을 찾아가서 프린지의 개념에 대해 소개하기도 한다.
사실상 축제를 통하여 무엇을 전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통해 우리가 관객과 프로그램 간에 발생하는 반응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다. 북경 LDTX 무용단의 환경연극, 전위예술에 가까운 공연현장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중해서 공연을 보고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이런 활동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실은 시장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상해에는 이런 관객들이 많이 있고, 그들의 열정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

 

Q. 사무국의 상주 직원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축제 때는 자원활동가들이 있나?

A. 그렇다. 대부분 상해음악학원 예술경영전공의 졸업반 학생들이고, 프린지에서의 활동이 졸업실습에 해당한다. 보통 축제 전후로 5-6개월을 일하게 되는데, 초기 트레이닝부터, 프로그래밍, 홍보마케팅 등 각 파트에서 일하게 된다. 상징적인 의미를 보수를 지급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축제를 통해 실질적인 단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Q. 앞으로도 상해 혹은 중국 내의 다른 도시에서 축제를 지속적으로 해나갈 생각인지?

A. 물론이다. 2,3년 후에는 프린지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길 바란다. 가장 좋은 것은 매년 이러한 행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전국 각지에서 열리길 바라는 꿈을 꾸고 있다. 물론 현지 기관의 지지와 문화적 환경이 허락해야 가능하겠지만.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이 중국의 주류예술계와도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중국 사회에서도 차츰 이런 종류의 공연예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날이 왔으면 한다.

 

Q. 마지막으로 당신이 중국에서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이 중국에서 어떤 성과를 이루어 내기를 희망하나?
A.
그 전에 먼저 강조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사실 그 정신으로만 따지자면 프린지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중국에서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은 아니었다고 본다. 중국에도 각 장르에서 뛰어난 전위예술단체들이 묵묵히 수면 아래에 존재했지만, 심사 비준 등 법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밟을 수 없었기 때문에(적법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변방을 배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최근 중국을 둘러싼 환경 전체가 크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예술들이 계속 변방에 고립되어있는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도 당당히 심의를 신청하고, 합법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하는 선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부의 문화부문이 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회의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행사 자체를 성공적으로 잘 치르고, 실질적인 결과물을 꾸준히 보여주면 결국은 설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인터뷰 및 정리: 장혜원 (원커뮤니케이션 대표)

본 인터뷰는 상하이의 대표적 창의 산업 특구인 티엔즈팡(田子坊) 예술촌 초입에 자리한 프린지 상하이 사무국에서의 1차 미팅과 추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졌다.

  • 기고자

  • 장혜원 _ 국립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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