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포괄적인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위해 각색하다
_K-뮤지컬국제마켓 후기
_김영원(리디아김) 뮤지컬 프로듀서
1990년대 초 세계적인 문화 인류학자였던 할아버지께서는 연구 및 특별초청 자격으로 참가한 한국 최고의 전통음악과 춤, 의상 전시회에 어린 나를 데려가셨다. 당시 민속 음악 거장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음악에 매료되었고 당시에 듣고 본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미국에서 거의 5년을 보낸 다음 막 한국으로 돌아온 터여서 너무도 기억이 생생하고 이후 나 자신 안에서 한국과 미국의 조화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2010년 대학원 공부를 위해 뉴욕을 다시 찾은 난 음악 프로덕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바쁜 가운데서도 가능한 많은 쇼를 관람하였다. 당시에는 극중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 비교적 생경한 시기이기도 했고, 클래식을 다시 만드는 작업과 함께, 언제나 그렇듯 브로드웨이 방식대로 새 아이디어를 실험했다. 출연진 중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라틴계가 포함되어 있기만 해도 다양성을 인정받았고 아시아계는 주로 지중해나 중동의 인물을 연기하던 때였다. 뮤지컬 분야에서 일하는 아시아인을 만나거나 이에 대한 기사를 읽는 일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 당시는 백인처럼 ‘리디아’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프로듀서 리디아김과 제인 베르제르,〈십이야〉(뉴욕 벨라스코 극장) 개막공연일 (2013.11.10)
얼마 후〈컬러 퍼플The Color Purple〉(2015-2017)이 브로드웨이에, 인기연속극〈트렌스페어런트Transparent〉(2014-2017)가 아마존 프라임에,〈포즈POSE〉(2018-2021)가 FX,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에 올려지면서, 이 뛰어난 작품에서 창작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2017년에는 미투 운동으로 직장에서의 권력을 남용하는 일과 성폭력/성희롱에 대한 공개적 비난이 시작되었다. 그 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창궐하면서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일과 휴식을 찾게 되었고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살인 영상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아시아계 및 아시아-태평양계가 코로나19를 불러왔다는 비난과 함께 이들에 대한 증오가 시작되었다. 이번 달에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후보자를 뽑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가 단 한 명의 흑인 회원 없이 2022년 후보자 목록을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받고 있다. 이상의 일들은 물밑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도용으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년 6개월간의 휴지기를 보낸 지금의 브로드웨이는 2년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출연진은 성정체성, 육체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훨씬 다양해졌고 따라서 문화적 다양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아시아계 창작자나 출연진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여 그 수가 미국에서 아시아계가 실제로 차지하는 비율에 근접하고 있다. 2021년 12월부터 2022년 4월까지 개봉되거나 프리뷰가 예정된 44개의 작품 중 34개의 작품, 즉 77%의 브로드웨이 쇼에 아시아계 창작자나 출연진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당 한두 명이 참여한다는 것인데, 이는 미국 인구의 5%를 차지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비율에 준한다.〈테이크 미 아웃Take Me Out〉(2022)의 토니상을 수상한 디자이너 린다 조Linda Cho,〈하데스타운Hadestown〉의 음악감독 데이비드 라이David Lai와 배우 에바 노블자다Eva Noblezada,〈해밀턴Hamilton〉의 배우들 에디 리Eddy Lee(해밀턴Hamilton 최초의 아시아계 출연진, 줄여서 #HamilAsian 이라고도 함), 진 하 Jin Ha와 마크 델라크루즈Marc Delacruz (최초의 아시아계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등이 이번 시즌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 극작가 제이슨 김Jason Kim과 작곡자 헬렌 박Helen Park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매진된〈K-POP〉을, 박천휴와 윌 애런슨Will Aronson은〈어쩌면 해피엔딩〉을 브로드웨이에 올리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
2014년 토니상 "뮤지컬 최고의 의상 디자인" 상을 받은 린다 조의 스케치.〈사랑과 살인에 대한 신사 안내서〉(린다 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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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독자성 역시 아주 재미있게 얽혀있다. 최근에는 해설 역할의 배역에도 사진 제출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백인 여성인 내 친구는 올해 얼굴이 아시아계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는 맞지 않아 원서조차 내밀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반해 진 하Jin Ha는〈해밀턴Hamilton〉에서 에런 버Aaron Burr 역을 맡았는데 배역과 외관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기량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에서 에런 버는 코카시안 남자, 즉 백인이다. 현재는 배역을 맡기는 기준이 소수 민족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 같으나, 기준이 시계추와 같이 움직이고 있기에 향후의 동향이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
토니어워드를 수상한 린다 조 (출처: Shutterstock)(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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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밀턴에서 에론 버 역을 맡고 있는 진하 (출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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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티 앤 마일스Ruthie Ann Miles(〈왕과 나〉로 2015년 토니상 여우주연상 수상)와 애슐리 박Ashley Park (〈K-Pop〉,〈민걸즈Mean Girls〉), 샤오샤오 차오Xiaoxiao Cao (〈오페라의 유령〉)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걸 보면서 어깨가 우쭐해졌다. 대표주자 중에 나와 비슷한 이들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된다. 동료들도 극장계에서 아시아인으로 지내기 쉬워졌다는 내 감상에 동조한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및 예술의전당이 공동으로 주관한 제1회 K-뮤지컬국제마켓에 초청되어 다녀왔다.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와 한국 프로듀서들이 현재 트렌드와 협력을 논하고 서로 응원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현장에서는 저마다의 공연 취향과 협력방식을 논하며 서로에 대해 배웠고, 무엇보다 공연을 풀 스케일로 올리는 것에 대해 공유하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 되었다. 팬데믹 시대에 K-뮤지컬국제마켓이 열린 것은 대성과이다. 주최진과 운영진은 안전수칙을 절대적으로 지켰고 이를 체험한 해외 게스트들은 매우 놀라기도 했으나 안도감을 표했다. 앞으로는 이 마켓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한국에서 개발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서로 자극하고, 협력할 기회를 제공하는 |
제1회 K-뮤지컬국제마켓에 참석한 프로듀서 코디라슨, 제인 베르제르. 리디아 김 (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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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되리라 본다. 한국의 음악, 영화, 스트리밍 컨텐츠와 요리까지 세계의 인증을 받는 가운데에, 본토에 와서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정체성이 일면적이거나 단순한 사람은 없기에 보다 다양한 스토리와 스토리텔러들을 포용하는 브로드웨이를 보는 일은 큰 기쁨이다. 이전에는 테두리에 있던 아시아인임이 지낼만했다면, 지금은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제법 안락하다. 아시아인이자 미국인이기 때문에 기여할 능력이 더 크다고 본다. 10대였던 날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크레이지 포 유Crazy For You〉에 데려가신 아빠가 “뉴욕에 왔으면 브로드웨이 쇼 한 편은 봐야지”라고 한 기억이 새롭다. 10대가 되는 내 아이를 브로드웨이에 데려갈 때는 “어떤 스토리를 보고 싶니”라고 물으며, “아시아계 미국 어린이의 시대” 혹은 “미국 원주민 음식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싸움” 아니면 “중동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화성에 다녀온 이야기를 다룬 쇼”를 볼 것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일 것 같다. 논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는 무한대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경험에 대해 공유할 바가 많고 보여줄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
프로듀서 제인 베르제르와 리디아 김, 스티븐 손드하임을 추모하기 위해 ‘선데이’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퀘어. (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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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리디아김)
김영원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CATS〉제작에 협력프로듀서로서 참가했으며〈Mythic〉,〈Del Valle〉,〈Houdini〉등과 같은 작품개발에 기여했다. 김영원은 제1회 K-뮤지컬 국제 마켓에 초대받았으며,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와 뉴욕을 방문한 제작들과 공연과 학생들에게 수차례 극장 워크숍을 주최한 바 있다. 김영원은 뉴욕의 New School에서 국제관계학 분야의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국 아리랑TV 기자로 일한 바 있다.(lydiakimen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