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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넥션 자율형 리서치 에세이 (2) 코로나19 시대, 춤의 가능성 – 북유럽 무용가를 중심으로 2021-03-03

커넥션 자율형 리서치 에세이 (2)
코로나19 시대, 춤의 가능성 – 북유럽 무용가를 중심으로

김신우 (독립프로듀서)

커넥션 자율형 리서치 소개

(재)예술경영지원센터는 2010년부터 커넥션(KAMS Connection) 사업을 실시하여 한국 공연예술 전문가들의 지속가능한 국제교류 활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해외 공연예술 시장 리서치 및 후속 프로젝트 개발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공연예술 국제교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지금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국내외 공연예술 전문가 간의 협력을 지속하기 위한 대안의 방법을 함께 시도하고 찾아 나서고자, 비대면 협력 중심의 ‘한국-노르딕 커넥션’, ‘자율형 리서치’, ‘국제협력 우수프로젝트 개발지원’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총 10건이 선정되었습니다. 이 중 ‘자율형 리서치’ 참가 선정자인 박초아, 김신우 프로듀서의 에세이를 공유합니다.

[ 커넥션 자율형 리서치 에세이 (1) - 박초아 프로듀서 편 보기 ]

이 글은 2020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자율형 리서치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했던 리서치 내용을 갈무리 한 것이다. 리서치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온라인을 경유하지 않으면서도 예술가들이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프로젝트가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 상실된 경험과 감각을 다시금 생성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간 무용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 온 북유럽 출신의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리서치를 했고, 메테 잉바르센, 메테 에드바르센, 마텐 스팽베르크 등 세 명의 북유럽 예술가들에게서 나름의 방법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온라인 스트리밍 공연 그 자체를 거부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작품 세계와 일치하면서도 시대적 상황에 부합할 수 있는 형식을 고민하고 있었다.

1. 메테 잉바르센(Mette Ingvartsen, 덴마크)

1) COVID-19 사태 이후의 활동 사례: BoCA, <매뉴얼 포커스(Manual Focus)> 공연과 대담

BoCA Online1)에 초청된 메테 잉바르센은 격리 중인 자신의 집 복도에서 가장 초기작 중 하나인 2003년의 <매뉴얼 포커스>를 약 12분 정도로 짧게 선보인 뒤, BoCA의 예술감독인 존 로마오(John Romão)와 대담을 나눈다.

잉바르센이 계속해서 거부해오던 온라인 공연을 처음으로 수락하면서 이 작품을 공연하기로 선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매뉴얼 포커스’ 즉 카메라의 수동 포커스라는 작품 제목이 시사하듯, 이 작품이 처음부터 카메라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구상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연에서는 퍼포머가 늙은 남성 마스크(가면)를 머리 뒤로 오게 쓰고 기어 다니는데, 그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 노인과 청년, 앞뒤, 위아래, 정상과 비정상 등의 이분법이 모호해지며 언캐니한 느낌이 발생한다. 세 명의 댄서가 참여하는 원작에서는 퍼포머들이 가면을 쓰고 몸을 숙이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연습 과정에서부터 늘 카메라로 각 동작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녹화를 한 뒤 확인하면서 안무를 만들어갔다. 이 과정은 묘하게 카메라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 같은 상황, 카메라라는 사물 그 자체가 무엇을 어떻게 볼지 결정하고 승인하는 주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작품은 관람자 혹은 카메라가 수동으로 선명도를 조절하는 과정(즉 무엇을 어떻게 볼지 선택하는 눈의 조정 과정)에 주목한다. 그러나 어떤 부분이 선명해지면(이를테면 노인의 가면), 다른 부분이 기괴해지는(이를테면 어디가 앞뒤인지 알 수 없는 몸) 끊임없는 미끄러짐을 통해 시각이라는 감각 작용과 그것을 의미화하는 인지 작용 간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핵심이다. 잉바르센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반드시 카메라 앞에서 공연해야 한다면, 애초에 카메라라는 사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시각과 관점의 문제를 다루는 이 작업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메테 잉바르센 <매뉴얼 포커스>, 2020, BoCA

노인의 마스크는 이 공연에서 퍼포머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즉 ‘식별 불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요소다. 2003년 작품을 만들던 당시에도 이러한 식별 불가능성은 잉바르센에게 중요한 주제였고, 이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CCTV, 지문, 홍채, 얼굴인식 등 모든 것이 식별 가능해지는 오늘에도 여전히 첨예한 이슈이며, 더 나아가 코로나19 상황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염자의 역학조사를 위해서 고도의 감시 기술과 식별 기술이 총동원되는 현 상황 속에서 공익과 인권 침해의 구분선은 그 어느 때보다 흐릿해지고 있다. 잉바르센이 쓰고 등장하는 노인의 마스크는 오늘날 식별불가능한 개체가 갖는 전복적 가능성을 시사한다. 동시에, 한 개인을 특정한 정체성에 고정되지 않는 개체로 만듦으로써,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주체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실시간으로 노출해야 하는 사회적 강박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그런 관점에서, 서구권에서 올 한해 내내 논란이 되었던 마스크 착용 이슈(얼굴은 인간의 소통과 교환을 정초하는 모든 것이므로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생명 권력의 작동이라고 말한 아감벤이나, 유럽 곳곳의 도시에서 열린 마스크 착용 거부 시위 등)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작품은 필수가 되어버린 마스크가 인간의 얼굴성을 추앙하는 정체성 정치와 통제 사회로부터 나름의 탈출 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고민하게 한다.

팬데믹 시대의 온라인 스트리밍 공연과 관련하여 잉바르센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명확한 것 같다.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성찰할 수 있게 돕는 작품 내용과 카메라, 스크린, 시선 등 온라인 관람 조건을 작품의 일부로 가져오는 형식이 결합하였을 때 여러 층위의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는 ‘공연’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런 방식이 무용과 예술 전반에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작품이 코로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삭막하고 지루한 시대가 어디 있을까? 모든 작품이 카메라와의 관계 맺기를 고민해야만 하는 것일까? 친밀함의 감각은 스크린 속 원근감으로밖에 구현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리서치를 하던 가운데, 2008년, 팬데믹과 전혀 관계없는 맥락에서 진행되었던 잉바르센의 또 다른 프로젝트 <내 프라이버시는 어디에? Where is my privacy?>에서 흥미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2) <내 프라이버시는 어디에?>로 보는 대안적 방법론

<내 프라이버시는 어디에?>는 2008년 잉바르센이 구상하여 마노 상킨(Manon Santkin), 시라 브루트만(Sirah Foighel Brutmann)과 함께 구현한 프로젝트다. 잉바르센은 유튜브와 SNS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면서 ‘사생활’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 주목하며, 과거에는 개인 정보라고 여겨졌던 것들을 과잉 노출하는 일상의 행태를 작품 제작 방식으로 차용한다. 이 세 명의 퍼포머가 지켜야 하는 룰은 직접 만나거나 전화나 메신저, SNS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유튜브 채널에 비디오를 업로드하는 방식으로만 소통하며 작업을 만들어나가는 것이고, 이 유튜브 영상에는 절대 자신의 춤추는 모습을 담지 않는 것이다. 유일하게 주어진 춤의 방향성은 ‘트랜스 댄스’2) 동작을 이용할 것과 공상과학 소설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상상적이고 사변적인 정신 상태를 (재현이 아니라) 반영할 것. 8월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서 세 퍼포머는 6개월간 각자 자신의 춤을 발전 시켜 나갔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유와 감정, 질문들을 짧은 유튜브 영상으로 남겼다. 100여 편의 영상이 모였고, 셋은 이듬해 2월, 공연 당일 무대에서 만나 곧바로 공연을 시작했다.


메테 잉바르센 <내 프라이버시는 어디에?>, 2008, 유튜브

당시에 잉바르센이 가졌던 사생활과 소통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은 2021년에는 너무 당연한 조건이 되었지만, 작품의 작업 방식은 팬데믹 시대에 다시금 의미를 갖는 창작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단순히 퍼포머들이 서로 만나서 연습을 할 수 없다는 물리적인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넓혀 나가는 사변의 영역과 무형의 연결고리가 오늘날 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업 기간 내내 세 명의 퍼포머는 머릿속으로 무대 위 서로의 존재를 투사하고, 서로의 동작을 상상하고, 자신의 몸과의 배치를 그려보면서 무한히 많은 버전의 공연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예술이 13인치의 모니터로 납작해지고 평평해지는 가운데, 어쩌면 온라인 매체의 힘은 그것으로 가시적인 무언가를 포착하고 기록할 때가 아니라, 광활한 상상의 영역을 촉발하기 위해 사용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이 프로젝트에서 공연은 한 편의 온라인 시청각물로 화석화되는 것이 아니다. 작업 과정에서 퍼포머와 관객들이 떠올렸던 모든 상상이 각각 공연이 된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조건이나 환경에 좌우되는 것 같지 않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오히려 이 프로젝트에서처럼 단절되고 파편화된 소통 속에서 타인이 남긴 조각을 자신의 조각과 이어 붙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더 공고해진다.

3. 메테 에드바르센 (Mette Edvardsen, Norway)

1) 온라인 공연과 극장에 관하여

최근 KnowBox Dance3)와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에드바르센은 춤이야말로 시각적인 예술 형태가 아니라, 다른 감각이 함께 참여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은 에드바르센이 온라인 공연을 고려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다. 라이브 공연만을 물신화하거나, 녹화 공연에 무조건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 춤이 촉각, 청각, 후각, 근감각 등 시각 외의 다른 감각 경험이 퍼포머와 관객 모두에게 작용하는 예술형식이라고 봤을 때, 온라인 공연이 그러한 감각 경험을 어떻게 발생시킬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에드바르센은 또한 작품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작가의 의도가 온라인에서 여러 번 작품을 리플레이하며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거나, 작품의 내용상 시공간의 맥락과 관계없이 다수에게 선보여지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에드바르센은 자기의 경우, 어떤 특수한 감각적 경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맥락에서 이탈한 채 상시 관람 가능하도록 작품을 남기는 것에 특별한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드바르센이 극장이나 무대 위에서의 공연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게 퍼포먼스는 행위라기보다는 [...] 시간이라는 재료와 관계 맺는 것이4)”라고 말한다. 시간과의 관계를 발생시키는 한, 공연은 도서관 계단에서나, 대기실에서, 하나의 책으로, 퍼포머의 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극장 공연이 제약에 처한 팬데믹 시대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 있다. “과거에 관해서도 쓸 수 있고 미래에 관해서 쓸 수도 있지만, 현재에 관해서는 쓸 수 없다”5)라는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드바르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춤과 퍼포먼스가 현재에 대한 독특한 감각 경험을 통해 상상을 촉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시공간과 몰입의 지점을 필요로 한다. 그의 관점을 다소 이분법적으로 해석한 것일 수 있으나, 단순한 온라인 녹화 공연의 스트리밍은 그런 면에서 한계점을 가진다. 많은 경우 모든 것이 선명한 시각 정보로만 수렴되며, 고도의 기술과 자본을 들이지 않고서는 좋은 퀄리티의 라이브 스트리밍을 구현해 현재성을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특히 뚜렷한 서사나 현란한 움직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여백이 많은 작품의 경우 관객이 그 여백을 자유롭게 채워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똑같은 공연을 온라인에서 하게 되면 그러한 여백은 지루하게 느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화면 전환’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2) 팬데믹 시대의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

메테 에드바르센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모든 ‘무대’ 공연이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된 가운데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Time has fallen asleep in the afternon sunshine)>라는 공연은 이탈리아, 라트비아, 스페인 등에서 여전히 공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퍼포머가 “살아있는 책”이 되어 자신이 선택한 책을 첫 장부터 외운 뒤 관객과 1:1로 만나 들려주는 작품이다. 구조는 단순하지만, 작품은 기억과 망각, 실천과 반복, 시간성, 관객과 퍼포머의 관계 등 공연예술의 여러 핵심적인 의제들을 건드린다.

메테 에드바르센과의 인터뷰에서 필자는 이 작품이 팬데믹 시대에도 공연될 수 있는 이유와 의의에 관해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가장 단순한 이유는 이 작품이 예술가의 물리적인 이동을 요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현지 퍼포머의 개인적인 실천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에 코로나19의 이동 제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겠지만, 이 작품은 그밖에도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Photo © Document Photography - Sydney Biennale(2018)


Photo © Titanne Bregenzer

먼저 에드바르센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퍼포머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책을 외운다는 것은 결코 벼락치기로 며칠 만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더 열심히 한다고 더 잘 외워지는 일도 아니며 매일 매일 꾸준한 시간과 관심의 투여를 필요로 한다. 활동이 제한된 격리 상황 속에서 이렇게 시간을 들일 수 있는 루틴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더욱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하는 강박 속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던 개인이 팬데믹 사태로 갑자기 멈추게 되었을 때, 그것은 반드시 편안한 휴식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불안감, 우울감, 공허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책을 외운다는 일견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과업은 지금까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생산성과 효율성의 논리를 되돌아보게 하며, 대안적인 삶의 리듬과 목적의식을 제안한다. 무엇보다 책을 외운다는 행위는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관계가 없다. 이 작품의 퍼포머는 대부분 평범한 일반인이다. 에드바르센은 책을 ‘더 잘 외우는 능력’이나 ‘기술’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에게나 두 달 남짓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퍼포머는 ‘몸이 알아서 외우기 전략을 찾아가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자기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전략대로 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책의 장면을 이미지로 상상하면서 외우게 되고, 어떤 사람은 글자의 모양과 페이지의 위치에 따라 외우게 된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악보가 손가락 근육에 기입되어 있듯이, 책을 외우는 과정 역시 많은 부분 ‘몸의 작용’이다. 그리고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누구나 몸 어딘가에 책을 기입하게 된다. 책을 외우고 난 뒤 많은 퍼포머들이 ‘이게 자기한테 가능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하는데, 이처럼 ‘살아있는 책이 되어가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몸이 가진 잠재적 역량을 알아가는 경로이다. 몸이 줌 스크린의 얼굴로 환원되어 현존감을 잃어가는 팬데믹 시대 속에서 이처럼 다시금 자신의 살아있는 몸과 그 역량을 되새기는 일은 공연예술의 중요한 역할이 된다.

이 작품은 보통 도서관이나 쇼핑몰 등 극장이 아닌 일상 공간에서 1:1로 진행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극장이 폐쇄되거나 인원이 제한될 때에도 공연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무엇보다 두 명의 낯선 이들이 만나 일상의 한 귀퉁이에서 전혀 다른 시공간을 공유하는 그 경험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살아있는 책’이 관객을 만나는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오디오북과 달리 관객의 반응과 자세, 주변 환경에 따라 어떤 때는 책이 술술 외워지기도 하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문이 막힐 때도 있다. 두 달간의 외우는 기간뿐만 아니라 공연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도 퍼포머는 앞에 있는 관객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이를 두고 어떤 관객은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경험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고 했다. 계속되는 단절에 지친 우리에게, 이런 ‘돌봄’의 정서는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에서 절반은 관객의 몫이다. 스쳐 지나가며 ‘좋아요’ 버튼을 누를 수도 없고, 오른쪽 키로 빨리감기를 할 수도 없는 이 작품에서 책을 읽는 3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관객은 옴짝달싹 못 하고 퍼포머에게 집중하고 반응해야 한다. 이런 형태의 집중은 오늘날 특히 더욱 낯선 경험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관객이 이 작품을 보고 “책과 나만 세상에 놓인” 것 같은 기분을 받는다고 했다. 에드바르센이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진행된 공연에서 퍼포머와 관객이 온라인에서 만나 줌으로 공연하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것도 이렇게 동떨어진 시공간의 감각이 온라인 스크린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1m 간격으로 마스크를 쓰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작품이 만들어내는 밀도 높은 친밀감이 얼마나 귀한 것이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최근의 공연에서 유독 감정적인 반응이 많았다는 에드바르센의 말이 쉬이 납득된다.

에드바르센은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이 프로젝트에서 새롭게 뻗어 나간 가지를 언급했다. 그간에도 프로젝트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었지만,6) 이 새로운 형태의 활동은 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된 책들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자신의 내용을 편지로 써서 보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20년 봄, 여름에 이렇게 오고 간 편지들이 모여 전시되었고, 그 자연스러운 귀결로 가을부터는 책을 읽고 싶은 독자가 신청하면, 책이 자기 내용을 적어서 편지로 보내주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메일이나 줌이 아니라 손편지라는 구시대적인 매체를 이용하는 이유는 편지를 쓸 때 드는 물리적인 시간과 근육의 움직임, 상대방을 위해 기억을 애써서 끌어내야 하는 노력, 필체에 녹아 있는 퍼포머의 성격과 등이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마텐 스팽베르크(Mårten Spångberg, 스웨덴)

마텐 스팽베르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소 확정적인 어조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면, 줌 공연이나 온라인 스트리밍의 형식은 택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춤과 움직이는 몸이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누차 강조했던 그의 저작을 미루어 보면 이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라 섭스탄스>, <나텐>,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 등에서 3시간에서 9시간에 이르기까지 긴 관람 시간을 고집하거나, 그 긴 시간을 반복적인 동작으로 채움으로써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해독 과정으로부터 관객을 해방시키는 형태의 작품을 선보여 온 그는 이와 같은 공연만의 시간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주의력(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이 춤의 역량을 이끌어내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고 본다. 이를테면 그에게 극장은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익명으로 현존하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아직까지는 온라인과 스크린을 경유한 공연이 이런 시간성을 획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많은 경우 공연예술의 이러한 특성은 사라지고 평평하고 납작한 경험, 넷플릭스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퀄리티와 재미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온라인을 선택해야만 하는 예술가의 의무감만 남는다. 그는 적어도 춤에 있어서만큼은 대안적인 방식이 필요하며, 그러한 대안을 계속해서 고민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1) 시간성과 주의력

“오늘날 공연 예술은 우리가 기업 문화나 SNS 등을 통해 너무도 잘 아는 주의력의 형태들을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주의력이 곧 경제인데, 이 말은 현대 경제가 시간의 최적화를,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한다는 뜻이다. [...] 오직 춤이나 공연 예술만이 발생시킬 수 있는 주의력이란 무엇일까? 연극과 무용은 어쩌면 우리가 온라인 접속에, 요가 수업에, 넷플릭스 알고리즘에 사로잡히지 않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담긴 규율이나 올바른 행동 때문이 아니라 무용과 공연 예술이 선사하는 다양한 양식의 욕망, 혹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통하여.”7)

앞서 에드바르센의 <오후의 햇살 아래...> 작품에서 새로운 시공간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스팽베르크에게는 현실의 리듬과는 조금 다른 시간성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강박적 속도에 대한 저항의 기제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주의력’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주의력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정보의 흐름 속에서 부단히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러 앱과 화면을 바삐 오가며 가능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많은 정보를 채굴하는 것이 오늘날의 미덕이다.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공연예술도 그러한 리듬에 맞춰가고 있다. 하지만 지구가 이 속도와 페이스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명확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 팬데믹 시대에 대안적인 리듬, 착취적이지 않은 주의력을 찾아내는 일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고, 스팽베르크는 공연예술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자유를 속박당한 채 꼼짝없이 앉아있는 것 말고는 다른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정보가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낭비되는 시간이 무궁무진한 무대. 1초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나태하고 낭비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곳. 논리적이고 인과적인 의식이 잠시 쉬어가는 동안 다른 감각 경험이 열리는 곳.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시공간에 진입하는 경험. 스팽베르크는 특히 지금, 이 시기야말로 이렇듯 “우리의 체험을 특정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공간, 생각할 거리를 지시하지 않는 공간, 무엇이 적절한 의견인지 규정하지 않는 공간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런 시기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형태는 익숙할지 모르나 그 체험은 계속해서 열린 것으로, 미정인 것으로, 생성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공간 말이다.” 하지만 극장이 문을 닫은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2) <그들은, 배경에 있는, 야생의 자연을 생각했다>의 방법론

스팽베르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가능한 국제 공연 프로젝트로 다음과 같은 대안적인 틀을 제시했다. 4인조 무용 작품을 만든다. 2명은 베를린에, 2명은 서울에 있다. 춤은 두 도시의 공원이나 길거리, 광장 등 코로나19로 제약을 받지 않는, 사유화되지 않은 공공장소에서 펼쳐진다. 각각의 퍼포머는 서로 다른 스코어를 받는데, 단순한 시퀀스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이 스코어 4개가 합쳐져 하나의 완성된 안무가 된다. 한 시간 남짓의 이 안무는 때로는 네 명의 군무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솔로, 듀오, 트리오로 변주된다. 공연은 서울과 베를린에서 완벽히 동시에 시작하고 동시에 끝난다. 서울에서는 해 질 녘 즈음인 오후 5시에 시작하고, 베를린은 해가 뜨는 아침 9시에 시작한다. 관객, 혹은 지나가는 행인들은 근처에 붙여져 있는 QR 코드에 접속해 스트리밍 되고 있는 음악을 들을 수는 있지만, 베를린에서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마텐 스팽베르크 <그들은, 배경에 있는, 야생의 자연을 생각했다> © 박수환

이러한 제안 속에서, 네 명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오직 퍼포머와 관객의 사변으로 남는다. 한국과 베를린의 퍼포머, 한국과 베를린의 관객은 온라인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머릿속에서 베를린과 서울을 잇는 가상의 실을 만들어낸다. 물리적으로는 ‘단절’되어 있는 존재들 간의 정신적인 연결망이 지구를 가로지르는 스케일로 확장된다. 이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오늘날 부재를 감각하고 애도하는 일인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연결의 파동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여기서 춤 그 자체는 정보를 최소화한, 가능한 간단한 동작 시퀀스들의 반복과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춤이 제시하는 정보가 너무 적어서 시선이 분산된다. 마침 작품을 공공장소에서 진행되고 있어, 주변의 풍경을 함께 관찰하게 되고, 해가 기우는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된다. 공원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나, 아파트 유리창에 비치며 깜빡이는 빨간 불빛, 떨어지는 낙엽 등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과 자연이 우리의 감각 체계로 들어오고,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촘촘한 그물로 세계와 연결되어 살아가는지를 환기한다. 스팽베르크는 그러한 생태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공공이 “되는” 일, 공공의 장을 발생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누군가와 시공간을 공유하고 세계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 점점 소각되어가고 있는 코로나19 시대에 예술의 역할은 필사적으로 그러한 공간들을 점유할 수 있는 전략을 찾는 것이 아닐까.

본 리서치에서 만나본 세 북유럽 예술가들의 방법론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은 공연예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시공간 속에서 상상을 통해 단절되었던 연결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사변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공유의 경험, 연결의 감각은 실시간으로 접속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다. 2021년에는 이런 사유를 토대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을 실험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김신우 페스티벌 봄, 부산국제영화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젝트에서 프로그래밍 어시스턴트와 프로듀서로 일했다. 현재 옵/신 페스티벌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통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1)   BoCA(Biennial of Contemporary Arts, 컨템포러리아트비엔날레)는 공연예술, 시각예술, 퍼포먼스, 음악에 집중하는 cross-disciplinary 비엔날레 프로젝트로,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포르투갈에서 열린다. 2020년 4월부터 “BoCA Online”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학자, 전문가들을 초대해 작품을 선보이거나 대담을 나누고 있다: https://www.youtube.com/c/BoCABienal/videos
2)   한 동작을 아주 미세하게 변형시켜가며 반복하여 일종의 트랜스적인 감각을 유발하는 춤
3)   Knowbox Dance는 무용영화제이며 올해는 서울과 달라스에서 12월에 개최된다. 60여 명의 안무가, 무용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http://www.knowboxdance.com/유튜브채널:https://www.youtube.com/channel/UCrxHm8MffqZSLQRAbB7IyWA/videos)
4)   Knowbox Dance의 인터뷰 발췌: https://www.youtube.com/watch?v=vkmpVqZ6W50&t=2s
5)   오슬로 Blackbox Theater의 메테 에드바르센 레트로스펙티브 프로그램의 문.https://legacy.blackbox.no/katalog/2015-mette-retrospektiv/pdf/mette_retrospektiv.pdf
6)   “살아있는 책”이 다시 자신의 내용을 기억에 의지해서 종이에 적어 물리적인 책을 만드는 것이나, 새로운 퍼포머가 이미 존재하는 “살아있는 책”으로부터 구두로 책을 전수받으며 자기 역시 “살아있는 책”이 되는 등의 번외 프로젝트가 있다.
7)   마텐 스팽베르크의 수행적 글쓰기 프로젝트  중 “대중이란 무엇인가”에서://www.notion.so/f8dcfd5ead8443819d8352a5315e4e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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