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대에 통하는 한국형 컨템퍼러리
[PAMS Choice] 시나브로 가슴에, 안무가 이재영
2013년 창단된 댄스 유니트 ‘시나브로 가슴에’의 리더 이재영은 서울예대와 한성대에서 함양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2010년에 들어 예술성과 대중 흡인력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는 신진 안무가 겸 무용가다.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최우수안무상 수상을 기점으로 2012년 한국공연예술센터(한팩) 라이징스타를 거쳐, 올 10월엔 시댄스(SIDance)와 서울아트마켓(PAMS) 초이스에 연거푸 초청되었다.
이재영과 ‘시나브로 가슴에’의 기존작을 살펴보면 “이런 게 국제무대에 통하지 않을까” 라는 상상하고 기대했던 매력 포인트가 여실하다. 그 중 2011년 초연 이래 국내 여러 무용 페스티벌을 휩쓴 <휴식>이 단적이다. 휴식의 간절함과 공허함을 그린 2인무라고 적힌 제작 노트를 읽다가 인체를 농구공으로 치환해 드리블과 피봇, 블로킹과 슈팅을 이어가는 무브먼트를 보고 있자면, <난타>가 넌버벌 퍼포먼스로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 도전해 얻었던 초기 반응들이 오버랩된다. PAMS에서도 이재영은 <휴식>으로 관객과 만난다. 어렵지 않은 현대무용, 대중성과 작품성, 국제 경쟁력을 겸비한 춤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직접 나누고 싶었다.
분절의 움직임, 파트너 따라 차별화
Q(한정호): 단체명 ‘시나브로 가슴에’ 이름이 독특하다.
A(이재영) : 우리말로 서서히 스며든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컴퍼니 ’SIGA’로 부르고 있다. 우스개로 시가(Cigaret)처럼 자연스레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도 담았다.
Q : 10월 시댄스와 팸스의 상연작이 다르다.
A : 먼저, 시댄스에 올리는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8일 강동아트센터)은 동명의 영화에서 이름을 따왔다. 개인적으로 수학 이론을 좋아하는데 우연히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을 읽게 됐다. 과학 연구원 친구가 무질서가 최고치가 될 때 균형이 파괴된다는 개념으로 설명해줬다. 여기에 사회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팸스에 올리는 <휴식>(9일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15시 30분)은 지금까지 너 댓 명의 파트너를 바꾸면서 그때마다 조금씩 세부를 손질한 작품이다. 파트너들이 가진 소질과 개성이 다르다보니 그들의 캐릭터에 맞춰 디테일을 달리했다. 예를 들어 여성 댄서와 했을 때는 세심하게, 남성 무용수와 함께 할 때는 아크로바틱을 더 넣어 에너지 볼륨을 높이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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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퀄리브리엄>(2014) | <중력>(2012) |
Q : 가령 <휴식>에서 파트너의 목을 농구공으로 설정해 이를 바닥에 튀기는 분절의 움직임을 보면 에미오 그레코(Emio Greco)와 유사하다. 극한의 움직임이 주는 유희는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를 연상시킨다.
A : 개인적으로 관절 하나 하나를 굉장히 많이 분절시켜서 시스템처럼 동작을 이어가는 걸 즐긴다. 아마도 에미오 그레코의 움직임도 그런 체계가 체화된 상태에서 움직임을 확장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레코의 경우도 1-2인무 중심이 많은데 나 역시 1-2인무가 많고 그게 편하다. 확장한다면 5인무 정도까지는 춤을 편하게 만들 것 같다. 공연 시간은 신작을 만들면 보통 20분인데 <기타리스트>라는 작품에선 40분 정도까지 확장해봤다.
아크로바틱과 힙합의 협업 범위
Q : 아크로바틱으로 40분을 채우는 건 쉽지 않고 관객 집중을 끌어내기도 만만치 않다.
A : 듀엣을 40분 이상의 긴 호흡으로 만드는 작품을 아직 구상하진 않았다. 2인무의 순도를 가다듬는 게 지금 고민하는 내용과 과정이다. <중력(Gravity)>(2012)을 만들 때 파트너 권혁과 처음 작업을 시작했다. 그와는 힙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해결책을 찾았다.
Q : <휴식>은 해외 관객도 쉽게 이해하고 좋아할 코드가 많은데, 원천은 힙합인가?
A : 춤을 만들면서 대중성을 고려하진 않는 편이고 위트 말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연배의 많은 안무가들이 힙합으로 춤을 시작했다. 내 경우에는 힙합과 극장 무용의 구분을 따로 하진 않는다. 굳이 몸에 스며들어 있는 힙합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안무를 시작하면서 ‘내 움직임의 정수가 뭘까’ 생각했는데 마임과 로봇춤이 내 전공이더라. 그런 움직임을 <휴식>에서 녹여서 정확하게 보여주고 싶다.
Q : 힙합이 협업 가능한 음악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안무가 호세 몽탈보(José Montalvo)와 무용수 도미니크 에르비유(Dominique Hervieu)는 힙합과 바로크를 융합하기도 한다.
A : 힙합 안에도 많은 장르가 있는데 분명히 클래식과 만나는 지점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고려해서 움직임을 만들기 보다는 움직임을 먼저 만들고 음악을 그 위에 덮는 형식으로 작업한다. 어린 시절, 스트리트 잼을 할 때는 재즈와 펑키한 음악을 좋아했다. 판소리부터 재즈까지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듣지만 아직 클래식을 염두에 두진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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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공연 모습 |
현행 제작 체계로는 레퍼토리 구축 어려워
Q : 신작과 기존 레퍼토리를 어떻게 균형을 맞추나?
A : 1-2년에 신작 하나를 만들려고 한다. 작품에 공을 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기존 공연물을 재공연하면서 발전시키는 부분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 여건에선 안무가가 커미션을 받고 레퍼토리화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다. 중장기 플랜을 갖고 연작으로 만들기 어렵다. 보통은 페스티벌 측에서 섭외가 오면 그때 신작을 만들거나 재단 심사를 통과하면 작업이 개시된다. 올해의 경우, 기존작을 버전업해서 재공연하고 싶었지만 지원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극장에서 장기 계획을 갖고 무용작을 지원하는 구조가 아닌, 1년 단위 페스티벌 심사에 의존한 제작 구조이기 때문에 현대무용의 레퍼토리화는 어렵다고 본다.
Q : 팸스와의 협력은 언제부터였나.
A : 올 여름 콩고와 남아공 워크숍 공연이 있었는데 그것이 종료 될 즈음 <휴식>으로 지원했다. <휴식>은 국내에서 반응이 좋았고, 지난해 싱가포르나 올해 벨기에 등 해외에 나가면 한국적 해학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 스스로 광대라고 생각하고 연희의 관점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점을 현대적으로 살리고 싶었다.
Q : 힙합을 기본으로 한국적 미덕을 극장 형태로 올리는 게 국내나 해외나 가능할까?
A : <휴식>의 경우, 하나의 움직임을 가지고 끝까지 간다. 움직임으로 시작해서 일상적인 해프닝들이 다른 이미지와 겹치고 음악을 듣게 되면 위트가 생긴다. 힙합의 그루브가 베이직이다보니 분절의 움직임이 많긴 하지만 사람들을 집중 시킬 수 있는 적절한 규모의 극장을 찾는다면 큰 문제가 될 거 같진 않다.
한국적 해학이 묻어나는 힙합
Q : 한국의 해학과 힙합이 통하기 위해 더 보충하고 싶은 장르가 있는가?
A : 마임이다. 연극인들과 작업하면서 일상의 움직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부터 다른 무용 단체의 공연은 잘 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면 잔상이 오래 남아 그 영향을 받을까 두려웠다. 발레는 트레이닝을 좋아하지만 국립발레단, 유니버설 발레단 등 국내 발레단이나 해외 발레단의 내한 공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Q : 다른 공연을 보지 않으면 컨템포러리의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
A :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게 트렌디화 되는 것이다. 어느 씬 안에 깊숙이 들어가서 허우적대는 것보다 조금 나와서 내 작업을 하는 게 좋다. 대학시절엔 사람들이 안 좋다고 하는 작품만 골라서 본적도 있다. 숨은 보석 찾기 같은 느낌이었다. 대신 영화와 전시를 즐겨본다. 장르가 다르지만 동시대의 담론이라는 맥락은 유사하다. 예를 들어 세월호와 관련해서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있지만 그것을 이슈로 작품을 만들고 싶진 않다. 무용은 시대적 발언을 직접하기에 조심스런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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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 시가 로고 | 안무가 이재영 |
Ⓒ컴퍼니 시가(Company SIGA)
2014 팸스초이스 선정 작품 : <휴식> <휴식>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공의 이미지와 지속적인 운동으로 인한 에너지 소진과 피로를 통해 휴식의 절실함과 그 후에 따르는 공허함을 표현하고 있다. 탄력적이고 유기적인 공의 움직임을 소재로 신체 에너지 사용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2011년 초연 이후 싱가포르 너스아트축제(NUS Arts Festival(2013), 벨기에 무용 비엔날레 <춤의 나라들>(2014), 콩고 뤼당스콩고(Rue Dance Congo)(2014) 등에 초청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2014 팸스초이스 선정단체 : 극단 놀땅 안무가 이재영은 서울예술대학교와 한성대학교에서 무용학을 공부했고 2004년 전국대학무용콩쿠르 금상, 2005년 한국현대무용협회 콩쿠르 은상,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서울댄스컬렉션에서 최우수 안무상, 같은 해 한국현대무용협회 신인안무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 안무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2012년 한팩 라이징스타에 선정되었다. 탁월한 테크닉과 표현력으로 무용수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재영은 이후 안무작업에서 몸의 독특한 질감을 강조한 신체 표현과, 연극과 마임으로부터 발전시킨 개성 강한 움직임으로 무용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안무 외에도 작곡 작업에도 참여하여 다양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안무가는 연극, 음악, 영상 등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을 시도하며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안무 작업을 즐기고 있다. “시나브로 가슴에”는 조금씩 천천히, 창작하는 이와 감상하는 이 모두의, 가슴으로 만들고 가슴으로 깊숙이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하겠다는 뜻으로 지난 2013년 창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