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공유한 인간의 가치
[PAMS Choice] 한승석 & 정재일
판소리와 굿, 타악을 섭렵하며 전통의 덕목을 체득한 소리꾼 ‘한승석’, 음악으로 가능한 모든 예술을 실천하는 전방위 천재 뮤지션 ‘정재일’. 그들이 <바리설화>가 지닌 보편적인 메시지에 주목했다. 자신을 버린 부모의 생명을 구원한 바리데기에서 용서의 의미를 발견했고, 국경을 넘는 인류애를 깨달았다. “먼지 자욱한 뜬 세상, 허물없는 목숨이 어디 있으랴(곡<빨래Ⅲ> 중에서)”만, 그렇게 한 장의 앨범 《바리abandoned」(2014)》에 담긴 11개 노래는 세상의 먼지를 조금씩 털어내길 기원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 이야기임은 국악과 서양음악의 물리적 결합을 넘은 ‘새로운 품격’이자, 이 시대에서도 소통 가능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 유산과 현대적 어법이 만났을 때 탄생한 음악
Q(민정홍) : 팸스초이스 선정을 축하하며, 인터뷰를 시작해보겠다. 먼저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해서다. 여러분의 처음이 기억나는가?
정(정재일 이하 정) : 생생하다. 형은 당시 국립창극단 단원이었다. 뿔테 안경에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고, 법조인이 입을 법한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기획사 대표님이구나 생각했다(웃음).
한(한승석 이하 한) : 그때가 원일, 김웅식과 그룹 ‘푸리’를 하던 시점이었다. 2001년 말이었나. 정재일이라는 대단한 친구가 있는데 같이 활동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막상 천재라고 하기엔 외모나 말투에 카리스마가 없더라. 그래서 속으로 의심을 했지. 처음 비나리를 작업하며 내 노래에 베이스와 구음을 넣는 걸 보고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Q : 그렇게 푸리로부터 13 년간 따로 또 같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2014년 이 시점에서 국악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지속적인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가.
정 : 전통음악은 정말 강력하다. 피를 토하듯 예술가의 모든 걸 뿜어내는 에너지가 있다. 특히 성악과 한국 무속음악에 빠져있는데, 세계 전통음악을 많이 들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런 예술이 없다.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아름다움. 나는 서양 대중음악가로 시작했으니 그걸 갖고 싶은 거다. 그래서 계속 음악적인 실험을 하는 것이고.
Q : 그 실험의 결과물이 《바리(abandoned)》에 담겨 있다. 앨범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이것이 국악의 ‘재현’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크로스오버나 콜라보레이션으로 지칭하기엔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다.
한 : 국악의 퓨전이나 세계화, 대중화를 고민하진 않았다. 그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걸 만들어보자”였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길 바라긴 했다. 판소리 완창을 하면서 강력한 힘을 느끼는데, 언제까지 마니아들만이 정확한 뜻도 모르는 곡을 즐기고 끝낼 것인가, 가장 한국적인 판소리에는 세계적인 보편성은 없는 것인가는 늘 고민이었으니까. 그래서 재일 씨의 악기들이 사람들과 친근하게 만났으면 했다. 그 가능성은 예전에 <적벽가>의 한 대목인 <자룡 활 쏘다>라는 곡을 작업하며 확인했다. 서로가 가진 어법들을 수용하고 다시 재창조하면서 거창할 것까진 아니더라도 ‘새로운 품격’이 만들어지더라.
정 : 전통을 언어로 했을 때 작곡가가 나대면 안 된다는 걸 푸리를 하면서 깨달았기에 성악가들의 판을 짜고 이들의 음악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길을 닦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 판소리 원형도 좋지만, 시김새(전통음악에서 음의 앞이나 뒤에서 꾸며주는 장식음 또는 잔가락)와 기(氣)가 잘 드러나려면 화성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학교 종이 땡땡땡을 부르더라도 화음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곡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고수(鼓手)의 역할을 하면서 필요할 땐 다이내믹을 줄 수 있고, 고유의 소리를 지키면서도 화성을 넣을 수 있는 악기인 피아노를 중심으로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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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석&정재일 <바리abandoned> 공연 |
버림, 버려짐, 용서, 별리(別離), 생멸(生滅), 희망, 구원의 노래
Q : 무엇보다 내용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설화의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되 그것을 인간의 희로애락을 빗대기도 하고(곡 <빨래>), 생명수를 찾는 과정을 아프리카의 어린 난민에 투영시켜 인간애를 환기한다(곡 <건너가는 아이들>). 현대적으로 탈바꿈된 텍스트 또한 흥미롭다.
정 : 아름다운 노랫말을 써준 배삼식 작가님께 공을 돌린다.
한 : 맞다. 셋이 모여서 토론을 했다. 그렇게 앨범 소주제와 레이아웃이 완성됐다. 바리는 어쩌면 뻔한 대상일 수도 있었다. 예부터 용서의 아이콘이자 구원과 희망을 말해왔으니까. 하지만 이 어지러운 세상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컸다. 전통음악의 이름으로 무거운 주제나 사회적인 문제를 풀어냈다는 주변의 칭찬이 들려 좋다. 사실 개인적인 강박도 좀 있다. 음악 형식만으로 듣는 이들이 신명나거나 한스러운 건 원하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가 설명돼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시대와 닿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리설화>는 옛이야기지만 분명 현재와 공유할 수 있는 인간적 가치를 지닌다.
Q : <바리설화> 외에도 가치를 품은 과거 이야기들은 많지 않은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바리설화>를 택한 이유와 여기에 동시대성이 부여된 까닭을 설명할 수 있을까?
정 : 엄밀히 말하자면 <바리설화>와 우리 앨범은 거리가 있다. 모든 내러티브를 뚜렷하게 살린 것도 아니어서 더욱 <바리설화>의 ‘정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불법체류자로 일하다 과로로 사망한 네팔인 마덥 쿠워를 기억하는 곡 <아마, 아마, 메로 아마>처럼 나올 수도 있고, 미움도 원망도 그리움도 <없는 노래>처럼 나올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작업하면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바리가 부모로부터 버려진 사실을 버렸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받았고, 망자의 혼을 인도하는 신으로 다른 영혼을 구원하게 된 거다.
한 : 곡 <바리(abandoned)>의 ‘바리어져 가리니’라는 가사를 예를 들 수 있다. 원래 ‘바리어져 가나니 / 가난 이’였지만 후반부에 일부러 의지형으로 바꿔 불렀다. 아픔에서 허덕이는 상태가 아니라 버림을 버려야 앞으로 갈 힘이 생기겠더라. 그런데 요즘 혼돈이 온다. 시대 상황을 보면 용서의 결과가 선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 판단이 서지 않는다. 확신에 가깝게 노래하려는데 이게 과연 옳은 것인가…… 몇 천 년에 축적된 결론으론 인간의 선함을 믿고 사는 게 맞는데, 아직 성찰이 부족하고 내 삶의 결과로 얻지 못해서인지 마음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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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abandoned> 공연포스터 | <바리abandoned> 공연 모습 |
Q : 충분히 공감하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이 우리나라를 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정 : 판소리, 한국 성악의 위력은 국경을 넘어선 것이다. 그 강력함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한 : 나는 반반이다. 전통 판소리는 워낙 퍼포먼스도 유니크하고 파워가 있는데 반해 서양악기가 곁들여진 우리 형식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받아들일지는 고민이다. 서정적인 곡에 잔잔히 숨어 있는 메시지나 음악적 아름다움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Q : 한글 가사지만 나도 처음부터 100%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바리>가 주는 감동은 직관적으로 마음에 와 닿더라. 분명 그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여러분의 성공을 바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겠다.
한 : 자료를 하나 둘씩 모으고 있는데 이번처럼 한국 소재 말고 세계 고전들을 어떻게 품을지 이야기 중이다. 또 하나는 살아가는 이야기, 특히 정(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우정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하나의 궤로 꿰어지는 음악들을 생각하고 있다.
정 : 최근 영화 <해무> 음악작업,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연극 <그을린 사랑>, 장민승 작가와의 설치작업인 <더 모먼트(the moments>에서 대중음악 그리고 다큐멘터리까지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분야는 그간 다 해 왔다. 그 중 한승석과 함께 하는 작업은 내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던지 아티스트 정재일의 작업이라고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다. 특히 진짜 협업이 어떤 건지, 그게 어떤 에너지를 낼 수 있는지 조금 더 배운 것이 이번 작품이다.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작업은 앨범 형식이 될 수 있고, 아니면 판소리 한바탕이나 오페라, 혹은 진혼곡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언어로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해보려고 한다.
한 : 이번 앨범을 지인들에게 선물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이라오”라고 썼다. 비로소 나다운, 내 역할을 조금이나마 다한 것 같다. 앞으로도 전통은 전통대로 지켜나가면서, 전통 안에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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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 | 한승석 |
Ⓒ블루보이
2014 팸스초이스 선정 작품 : <바리abandoned> 한국의 대표적 여성신화인 ‘바리공주 이야기’를 현대적 텍스트로 재구성한 월드뮤직 프로젝트 <바리abandoned>는 한승석의 소리, 정재일의 연주, 그리고 극작가 배삼식의 노랫말로 탄생한 앨범이다. 가장 한국적인 음악인 판소리와 가장 세계적인 악기인 피아노가 만나 버림, 버려짐, 용서와 사랑 그리고 뜨거운 인간애를 담고 있다. 바리신화에 당대의 삶을 투영하고 판소리와 피아노를 씨줄과 날줄 삼아 교직한 이들의 음악은 갈등과 분열, 소외와 상처로 얼룩진 동시대인에게 삶의 위안을 주는 구원의 메시지를 노래한다. 또한 음악적으로 판소리와 피아노 외에 기타, 베이스, 오케스트레이션, 컴퓨터 프로그래밍, 장고, 꽹과리, 징, 피리, 태평소 등 현대와 전통 악기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동서양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냈다. <바리abandoned>의 무대미술은 현재 공연계 최고의 무대미술감독으로 손꼽히는 여신동이 참여하여 공연의 완성도를 더하고 있다. 2014 팸스초이스 선정단체 : 블루보이 2012년 4월 설립한 기획사 ‘블루보이’는 음악기획/홍보/유통 및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와 공연기획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 현재 언니네 이발관, 재주소년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으며, 바우터 하멜(Wouter Hamel), 가을방학, 언니네 이발관, 재주소년, 줄리아하트 등 약 30여 개의 타이틀을 카탈로그로 보유하고 있다. 또한 제프버넷의 첫 내한공연과 소속 아티스트들의 단독공연 등 다수의 대중음악 콘서트를 주최/주관하였다. - 한승석 판소리와 굿음악, 타악까지 두루 섭렵하고, 이를 바탕 삼아 이 시대의 판소리가 담지해야 할 인간적 가치와 음악적 양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소리꾼. 위엄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애절함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춘 매력적 음색의 소유자로 현재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정재일 천재소년에서 아티스트로 성장한 슈퍼멀티플레이어. 10대에 ‘긱스’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최정상 아티스트의 음반을 프로듀싱하고, 영화나 공연을 위한 음악, 전시 및 설치, 퍼포먼스와 융합된 음악 표현 등 전방위로 그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