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리고 이 시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PAMS Choice] 드림플레이 테제 21 연출가 김재엽
지난 해 한국 연극계의 거의 모든 시상식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 작품이 있었으니, 관객과 평단, 언론 모두가 이토록 한 마음이 되어 환호를 보낸 연극을 만난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것은 대중의 기호를 읽어내면서도 동시대 한국 연극의 좌표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알리바이 연대기>로 2014 팸스초이스 연극 부문에 선정된 드림플레이 테제 21의 김재엽 연출을 만났다. 인터뷰 내내 이야기는 지난 작품들과 현재의 작업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을 종횡무진 넘나 들었지만, 그는 어떠한 질문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분명한 자신만의 연극관을 보여주었다. 바로 거기에 이 화제의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의 숨은 비밀이 있었다.
이야기가 형식을 만들기까지
Q(김슬기) : <알리바이 연대기>는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을 말 그대로 연대기적으로 구성한다. 형식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노골적인 목소리를 배제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작품의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궁금하다.
A(김재엽) : 2012년 대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대통령이라는 큰 존재와 나라는 개인이 만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에 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는 앞으로 살면서 어떤 대통령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어떤 대통령들을 만났을까, 하는 것들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치더라. 처음에는 에피소드 식으로 이야기를 나열해 보았는데, 작품을 수정하면서 뭔가 전체 이야기를 관통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때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가’ 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결국 권력과 개인,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게 됐고, 역사의 증인으로서 아버지를 불러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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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 연대기> 공연포스터 | 김재엽 작·연출의 <알리바이 연대기> |
Q : 처음에 쓴 글은 대본이 아닌 에세이 형태였다고 들었다. 100페이지가 넘는 글을 대본으로 고쳐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해서 무대화해 본 경험이 있지 않나.
A : 이전에 했던 <장석조네 사람들> 같은 경우 김소진 작가는 대화를 아주 잘 쓰는 작가에 속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사적인 것과 드라마적인 것이 같이 흘러간다. 드라마적인 것이 전면에 드러나면 자꾸 그것을 중단시키고 싶은 욕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화의 즐거움에 빠지면 허구적인 것을 따라가게 되고 결국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서사자의 역할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흔히 우리는 서사자가 재미있는 드라마를 중단시키고 지루한 말을 늘어놓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관객들이 정말 듣고 싶은 말을 한다면, 서사자의 말걸기가 훨씬 흥미로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해 2~3 페이지에 걸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3줄 짜리 작가의 말로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Q :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내용과 글쓰기 과정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결국 ‘나’라는 서사자가 등장하는 연극이 나온 것 같다. ‘자기 이야기하기’라는 동시대 연극 풍경을 의식하고 있나.
A : 사실 ‘드라마’라는 것도 하나의 형식일 뿐인데, 그걸 쓰다 보면 내가 이걸 왜 쓰기 시작했는지를 잊고 이 드라마가 얼마나 잘 구성이 되었는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미학적 완성도도 중요하겠지만, 그게 나한테 잘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나는 연극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다른 작품의 조연출조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해야 미학적인 걸 성취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기존의 형식들이나 이런 것에 크게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거라고 할까.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한다는 것
Q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완성도 얘기를 해보자면, <알리바이 연대기>가 펼쳐놓는 무대는 기존의 드림플레이 작품들에서 보였던 날것의 성근 세계와 분명 결이 다르다.
A : 솔직히 작품이 완성도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보수적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뭔지 한눈에 들어온다는 건 기존의 관념 안에 포함된 것이라는 얘기니까. 그보다 최근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관객들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내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이미 그 이야기를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많은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완전히 타자화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 그러니 함부로 계몽하려 한다거나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관객들은 진정성에 대한 자기만의 척도가 만족되면 언제든지 마음을 연다. <알리바이 연대기> 역시, 공연을 본 관객들이 자기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거나, 그 당시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 본다는 점에서 반향이 있었던 것 같다.
Q : 어떻게 보면 김재엽 연출은 동시대 현실로부터 얻는 것들이 많다. 아니 그보다는 현실을 잘 읽어내고 활용한다고 할까. 이야기의 소재부터 이야기하는 방식까지.
허 : 맞다. 사실 연극을 시작하고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때 작품들은 어떤 판타지나 부조리, 우화 같은 걸 만들어 내려는 시도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좀 더 보편적인 화두를 찾고 싶다. 단순히 현실에 대한 비판을 해봤자 이 문제는 끝도 없이 반복된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조금 더 넓은 견지에서 경제와 역사 같은 것들을 보려는 건데, 이걸 드라마로 만들어서 화석화하는 게 아니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시선이나 방법들을 고민 중이다. 지금은 김수영 시인에 대한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극작을 하면서도 가장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그 시대 작가의 이야기를 현재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다. 당연하게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취재를 해야만 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데서 연극하는 즐거움을 얻는다. 내가 알아내고 추적한 것을 관객들한테 들려주는 것, 그런데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구조에 그걸 맞추다 보면 상상력이 갇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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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 연대기> 공연모습 |
글쓰기와 연출하기에 대한 단상
Q : 과정이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스스로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겠지만 같이 작업하는 배우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A : 극작과 연출을 같이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연출가로서보다는 작가로서 배우들을 만난다. 말하자면 배우들은 최초의 관객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배우들이 잘 읽어내지 못하면 그건 내가 분명 잘못 쓴 거다. 관객들한테 공연 잘못 보셨어요, 할 수 없듯이 배우들한테도 그걸 왜 모르냐고 하면 안 된다는 거다. 어차피 내가 쓰고 연출하는 거라 작가로서의 나와 연출가로서의 내가 분리될 수는 없겠지만 연출가 역시 마스터로서의 자격을 가진 자가 아니라 하나의 관객으로서 피드백을 할 뿐이다.
Q :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오래도록 극작과 연출을 같이 해왔다. 언젠가 연출보다 글쓰기가 더 즐겁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어떤 맥락인가?
A : 이를테면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출할 때, 미처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가 작가의 마음을 먼저 읽으려고 하더라. 이건 이래서 중요한 대사고, 저건 저래서 살려야 하고. 이게 과연 좋은 연출인가 싶었다. 언젠가 동료 연출가들하고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연출만 하는 연출가는 정말 연출을 잘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극작과 연출을 같이 하는 사람은 왜 이 연극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연출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것마저 안 보이면 이 연극을 봐야 할 이유가 없는 거니까.
동시대 연극(아닌 연극)의 가능성
Q : 드림플레이 테제 21이란 이름을 걸기 시작했는데?
A : ‘연극이 아니어도 좋은 연극’을 생각한다. 극단 개념으로 오래도록 작업했는데 이런저런 한계가 오더라. 실제로 나를 포함해 단원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활동 반경이 넓어져 이제는 함께 모여 작업하는 것이 어려워지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라마를 벗어난 다른 작업 형태에 대한 고민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테마를 가지고 테제를 찾아나가는 것, 그건 꼭 ‘연극’일 필요는 없지 않나. 저널을 발행할 수도 있는 거고, 얼마든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 아닌 다른 연출가들이 드라마 중심의 연극을 공연하면서 극단 드림플레이로 활동한다. 드림플레이 이름으로 모여서 각자 하고 싶은 것을,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거다.
Q : 2014 팸스초이스에 <알리바이 연대기>가 선정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A : 작년 국립극단에서 초연한 이후 올해 재공연을 하고 대학로에서부터 시작해 계속 지방 공연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국공립에서 주도하는 기회를 얻어 보려고 했다. 이 작품이 과연 얼마나 수용될 수 있는지, 그냥 대학로의 민간 극장이 아니라 관에서 주도하는 행사에서 이 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런 긴장 관계를 만들어 보는 게 지금의 내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이 작품이 해외에 나가게 된다면, 나로서는 굉장히 새로운 자극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그간 한국의 공연들이 해외에 많이 나갔지만, 동시대 창작극으로 해외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뭔가 새로운 긴장과 동력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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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연출가 김재엽 |
Ⓒ드림플레이
2014 팸스초이스 선정 작품 : <알리바이 연대기> 2013년에 초연된 <알리바이 연대기>는 작가 자신의 기억 속 어떤 한 순간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평범한 한 개인의 인생 여정에서 나타나는 한국 현대사의 알리바이 연대기를 추적한 작품이다. 개인사와 현대사의 중요 장면이 겹쳐지는 서사의 완결성은 역사에 대한 관점과 자기 응시적 시선이 조화를 이루며 기존 창작극의 여백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촘촘하고 세세하게 삶에 천착함으로써 개인과 역사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을 극복하고 있는 <알리바이 연대기>의 성취는 한국 연극에서 정치극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4 팸스초이스 선정단체 : 드림플레이 테제 21 드림플레이 테제21은 극단 드림플레이의 프로젝트로 드라마형식을 극복하여 동시대 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새로운 연극을 지향한다. 주요작품 <알리바이 연대기>, <여기, 사람이 있다>, <장석조네 사람들>,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꿈의 연극>, <유령을 기다리며> 등이 있다. ※ 드림플레이 홈페이지 : http://www.dreampla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