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아프로 포커스

공연에서 공연적인 것으로, 예술에서 예술적인 것으로 2014-02-19

공연에서 공연적인 것으로, 예술에서 예술적인 것으로
[동향] 주목해야 할 새로운 공연 경향들 


급진적 또는 전위적인 현대 공연이라고 불리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계열의 작품 소개가 빈번해지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혼란과 발견을 안겨주는 이런 작품들을 어떤 위상에서 어떻게 봐야 할까는 늘 숙제였다. 유럽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국내에서 공연되기라도 하면 굳이 찾아보게 되면서 그 복합적이면서도 새롭다는 것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지는 재미가 상당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도 몇 년을 겪고 나니 새로운 형식과 변화에 대한 욕구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여기서는 최근에 유럽 예술을 통해 알기 시작한, 그러면서 짐작하게 된 경향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1)

1) 이 글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최근 유럽 공연예술의 경향을 요약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본인은 주요 페스티벌을 다니며 최신 현황을 갈무리하는 소식통도 아닐 뿐더러 가끔씩 참가하는 불규칙적인 해외 경험으로 전체 지도를 그릴 재주도 없다.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호기심 있는 것들을 리서치해 오면서 짐작하고 짜맞추어가고 있는 내용을 발표하는 것이다. 사실 에든버러 페스티벌, 아비뇽 페스티벌과 같은 큰 축제에 가서도 어떤 것이 새로운 경향인지 흐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감각체계 변화를 노리는 급진적 공연 미학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던 창작 그룹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이나 안무가 제롬 벨(Jérôme Bel)의 작품들은 ‘형식적’ 또는 ‘공연 언어적’ 실험을 전면적으로 표명하며 기존 체제와의 단절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이들은 수년 동안 급진적인 스타일의 대표 주자였고, 몇 년 전에야 겨우 장벽을 넘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글의 실마리가 출발한다. 이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연극이나 무용 형식을 기대해왔던 이들은 그들의 작품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제롬 벨의 <베로니크 두아노(Véronique Doisneau)>는 파리오페라극장이라는 유서 깊고 거대한 무대에 은퇴를 앞둔 발레리나가 달랑 연습복만 입고 등장해서는 개인사를 털어놓는 작품이다. 화려한 테크닉의 발레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거의 공백으로 채워진, 볼거리라고는 거의 없는 빈약한 무대에 이만저만 실망했을 것이다. 세계화에 따른 시공간의 압축과 동시성을 극장화한 리미니 프로토콜의 <콜 커타 인 어 박스(Call cutta in a Box)>는 관객이 인도의 콜센터 직원과 통화하는 작품이었다. 가상이지만 안전한 공간인 공연장과 익명의 고객을 다짜고짜 호출하는 ‘세계화’라는 리얼리티와의 간극에서 관객들은 막연히 으쓱거리거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모호한 대답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기는 봤는데 무엇을 봐야하는지, 내가 겪은 것이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태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바로 공연의 미학적 급진성이 잘 드러난 증거이자 아방가르드 예술이 그토록 줄곧 추구한 미적 감각이 꽃을 피우는 장면이기도 했다.

제롬 벨, <베로니크 두아노> 리미니 프로토콜, <콜 커타 인 어 박스>

리미니 프로토콜이 스스로 명명한 ‘다큐멘터리 연극’ 형식은 수십 편의 작품을 거치면서 이제 유럽에서 만개했다. 그들의 작품은 기존 무대의 언어가 구식이 되고 있음을 체감할 만큼 생산력과 확장성에서 큰 획을 긋고 있고, 2008년에는 유럽 극장이 뽑은 ‘새로운 리얼리티상’을 수상하는 등 이제는 주류가 되었다. <100% 베를린>은 세계 20여 개 도시에서 도시 이름을 바꿔 달며 재생산되고 있는데, 여전한 ‘형식적’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호응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2) 제롬 벨 또한 예외는 아닌데 장애인 여러 명이 차례대로 등장해 춤에 대한 생각과 실연(實演)을 보여주는 최근 작품인 <장애극장(Disabled Theatre)>은 유럽 공연예술시장에서 호응이 상당했다. 이제 관객은 정상/비정상의 고정관념을 조롱하며 그것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라고 제안하는 제롬 벨의 작품을 만끽하고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이 ‘충분히’ 이해된다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그 작가들이 초기의 급진성을 잃어버렸다는 신호가 아닐까. 아니면 이제 관객이 성숙해져서 실험과 전위를 이해할 만큼 문화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일까.

2) 올해 <100% 도시>는 그 15번째 도시로 광주를 선정하였는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이 제작 공연을 맡아 오는 4월에 열릴 예정이다.

리미니 프로토콜 <100% 베를린> 제롬 벨 <장애극장>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감각적인 것’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들인데, 이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 세계의 구성 원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급진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이라 얘기한다. 그는 우리 몸에 익혀진 행위와 말하기의 양식을 나누는 질서는 기존 체제에 의해 생산된 것이며, 예술의 모럴은 이 기존 감각의 분배를 파괴하고 새로운 분배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식별된다고 말한다. 제롬 벨은 보이는 것과(발레) 보이지 않는 것(현실의 무용수)의 구분을 전복시켜 관객의 감각을 무장해제시키며 감각의 재분배를 쟁취하려는 급진성이 뚜렷했다. 이들에게 전위적이란 이름을 부여한 것은 새로운 형식성을 탐구해서가 아니라 삶의 영역과 상호 관계 속에서 감각 체계의 변화를 노리기 때문이다. 예술 영역의 정치성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감각체계를 혼란시키고 파열시켜 새로운 종류의 감성적 분배가 가져올 삶의 형식을 만들려는 것에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아직도 그 힘은 여전한 것일까. 완전히 이해되어 찜찜한 질문을 남기지 않는 작품, 대답이 궁색한 화두를 던져주지 않는 작품이 기성의 질서에 도전을 할 수 있을까. 그동안 맹활약을 했던 작가들이 더 이상 감각적 체계에 혼란을 주지 못하고 있다면 다른 어떤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새로운 작가를 통한 갱신만이 해답일까.

관습적인 미적 감각과 수용양식을 걷어치우라

앞선 논의에서 전환하여 최근 2~3년 사이에 발생하기 시작한 또 다른 경향을 살펴보자. 이는 앞에서 언급한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가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시도하고 있는 경향이다. 그 첫 번째로 ‘슈타이리셔 헤르브스트 페스티벌(Steirischer herbst festival)’을 들 수 있는데, 그는 2012년에 <진실은 구체적이다(Truth is Concrete)>라는 타이틀, ‘예술에서의 정치와 정치에서의 예술’이라는 부제로 과감한 기획을 했다. 7일간 150명의 예술가, 활동가, 이론가들이 모여 강의, 공연, 연극, 전시, 토론을 24시간 이어가는 마라톤 캠프가 펼쳐졌다. 전 세계에서 모인 참여자들은 1주일 내내 머물며 예술과 정치, 삶의 변화에 대해 릴레이 발표를 하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 시기는 미국의 월가(Wall Street) 점거 운동, 아랍의 연쇄적인 민주화 운동의 영향이 점층적으로 증폭되던 때였다. 비슷한 때에 개최된 ‘베를린 비엔날레’의 경우도 현대미술 전시보다는 ‘점거(Occupy)’예술을 표방하며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장에 더 가깝게 보일 정도였다. 현실의 변화 욕구가 예술 현장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라톤 캠프에서 참가자들의 발표 사이사이에 벌어지는 공연은 주 무대에서 특별한 세트 전환 없이 이어졌는데, 공연의 준비를 잘했다기보다는 한번 달아오른 열기를 식힐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공연은 독립적인 영역을 지닌 객체가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와 표현의 공동체적 흐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표를 공연처럼 웃고 감탄하며 봤고, 공연의 경우는 교감을 위한 애드리브와 관객의 참여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색했다. 포스드 엔터테인먼트(Forced Entertainment)의 팀 에첼을 비롯한 20여 공연 팀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1주일 내내 공연과 토론에 참여하는 열기를 보였다.

슈타이리셔 헤르브스트 페스티벌, <진실은 구체적이다>, 24/7 마라톤 캠프

발표 내용은 ‘보고타 시(콜롬비아)의 변화; ‘반(反)선전으로서의 예술’, ‘예술과 범죄. 법의 경계에서’와 같은 정치적 주제와 액티비즘(activism)에 관한 발표, <무기로서의 힙합>, <이중국적의 예술>, <예술 할 시간이 없다고?>, <파업오페라> 등의 공연, ‘게릴라 가드닝’, ‘생물학적 불복종의 정원’과 같은 생태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였는데, 학술일변도이거나 일방적인 사례 발표나 강의가 아닌 축제성, 유희성, 상호 교감,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진 상호 교류의 장이었다. 주최 측은 누구든 전체 내용을 볼 수 있도록 웹사이트에 일주일간 기록된 영상콘텐츠 전체를 오픈 소스화하여 현장 중심적인 공연 메커니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여기에서 보고 겪은 것을 이름붙이자면 강의나 공연이라기보다는 ‘공연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언해서 강의, 공연, 전시와 같은 문화적 형식이 느슨해지고 상호 영역의 문지방이 낮아졌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보고타의 시장(市長)이 폭력과 경제난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사활을 걸고 재건하는 사례, 부족한 경찰을 대신해 마임이스트에게 교통 수신호를 맡기는 발상, 래퍼로 성공해 국제사회를 통해 조국인 콩고의 청소년들을 도우려는 음악가, 석유로 부유해진 노르웨이에서 대우가 달라진 예술가의 자화상을 풍자적으로 프레젠테이션하는 사운드 아티스트, 6시간 동안 꼼짝 않고 열렬히 토론하는 정치철학자와 예술가들…. 이런 발표와 논의가 반복되고 밀도가 짙어지면서 현장은 서서히 감각적인 것으로 탈구축되어 갔다. 그러면서 특정 감각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관객과 공연팀은 관습적인 미적 감각과 수용 양식을 걷어치우고 감성을 마음껏 발산하며 교감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며칠간 겪은 일시적인 축제성이고 과잉집중 상태였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공연 축제, 문화기획의 관행과 분할선을 의심하고 이를 다르게 감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술과 예술 영역, 인문학과 예술 현장이 분리되어 작동되는 관습이 굉장히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와 토플리스(topless)로 저항운동을 하는 여성운동가 간의 활발하면서도 깊이 있는 토론을 열심히 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예술’에서 ‘예술적인 것’으로

담론과 예술의 하이브리드라는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익숙해지고 있고 이를 지식 생산의 주제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보통 이런 방법론을 예술적 연구라 부르는데, 살펴볼 만한 예술적 연구 프로젝트로는 ‘퍼포먼스 매터스(Perfmance Matters)’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09년부터 매년 주제를 바꿔가며 ‘퍼포먼스 아이디어(Performance Idea)’(2009~2010), ‘퍼포먼스 버리기(Trashing Performance)’(2010~2011), ‘퍼포먼스의 잠재성들(Potentials of Performance)’(2011~2012’로 3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공연예술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에 따른 퍼포먼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실천 방식을 찾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퍼포먼스’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수년간 예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에 관심이 많다. 이들은 1년간 준비한 프로그램을 1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진행하는데, 현장에선 열정적인 학생과 예술가들이 전체 일정에 모두 참여하려는 열의를 보이기 때문에 예술캠프와도 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이들은 예술과 지식을 육체성, 물체성, 상황성, 수행성의 차원에서 다루고 접근하면서 ‘예술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출현시킨다.

첫해의 주제였던 ‘퍼포먼스 아이디어’는 동시대 예술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위상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예술을 둘러싼 지식의 체계, 제도가 어떻게 퍼포먼스를 에워싸고 있는지를 탐구했다. 예술가, 지식인, 기획자, 학술계에서 40여 명 이상의 발표자가 참여하여 <창조적 연구>라는 이름과 <종잡을 수 없는 프로그램> 방식을 진행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의 교류와 관계를 추구했다. 이러한 주제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지만 반면 막연하게 접근하다가 한계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이라는 수사로 그 현실적 한계와 무모한 도전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주요 프로그램 구성은 심포지엄과 워크숍, 공연과 강의, 아카이브, 연구 작업으로 되어 있다. 5일간 개최된 심포지엄의 주제는 ‘다른 지속시간들’, ‘살아있는 아카이브’, ‘상호적인 미학’, ‘수행적인 글쓰기’ 등이었는데 퍼포먼스 예술의 주요한 화두들을 이끌어냈다. 첫날 심포지엄은 시간성이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적 흐름에 동조하고 반발하면서 나타나게 된 다양한 퍼포먼스의 양상에 대해 논의했다.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 <응답자 매튜 굴리시와(With Matthew Goulish as respondent)>(2010)

워크숍 프로그램은 주로 신체 언어의 확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3명의 아티스트 중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가 먹고 자고 씻는 일상 행위와 조형(조각)의 언어를 교차시키는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했다. 다양하게 마련된 공연은 심포지엄과 강의 프로그램 사이에 주제와 병치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담론 과정과 상호적으로 조응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의 주제인 ‘퍼포먼스 버리기’와 ‘퍼포먼스의 잠재성들’은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첫해에 제시된 퍼포먼스의 현재성과 한계를 ‘해체’하고 ‘탈구성’하는 서구적 논리 순서를 따라 진행되었다.

아마도 위의 사례에서는 ‘예술’보다 예술‘성’이 더 긴요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려는 흐름에서 다양한 예술 형식과 표현들이 경계성의 외투를 벗고 흐물흐물하게 가공되지 않은 채로 지식의 틈을 파고들어 독특한 현상과 경험을 주조해낸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강렬한 문화적 형식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위의 프로젝트는 포럼, 강연, 워크숍, 공연, 전시 등의 단순한 더하기를 넘어 복합적이고 심도 있는 경험을 생산한다. 개별 문화형식을 모아놓은 하이브리드 프로그램이지만 그 내적인 밀도와 강도는 공동적이고 강렬한 문화적 체험으로 나타날 것이다.

  • 기고자

  • 오세형_아시아문화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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