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3주간의 기록
[집중조명-축제/마켓] 고래야의 에딘버러 프린지 도전기
모두에게 열려있는 모험의 장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공연예술 축제로 꼽힌다.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기억하며 국제 평화 교류를 위해 대형 극장들의 주도로 1947년 에딘버러 국제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이 열렸다. 이 축제에 초대 받지 못한 중소극장들의 연합으로 시작된 프린지 페스티벌은 주변부(Fringe)의 축제로 시작했지만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을 두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있는 자율적인 축제로 꾸준히 성장해 지금은 에딘버러의 가장 중심적인 축제로 발전했다. 프린지 페스티벌 기간에는 에딘버러의 모든 거리가 공연장으로 변한다. 대형 서커스가 열리는 특설 무대부터 작은 골목의 술집까지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공연이 계속된다. 프린지 사무국 집계에 따르면, 올해는 2,871개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한다. 집계에 포함되지 않는 자율적인 거리공연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난타를 시작으로 극단 여행자, 모시는 사람들 등, 많은 한국 공연단체들의 에딘버러 진출이 이어졌다. 현대적인 밴드 형태의 국악을 지향하는 ‘고래야’는 올해 콘서트 레퍼토리를 내용으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코미디와 넌버벌 작품이 주류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유럽권에선 아무 인지도가 없는 한국의 밴드가 한국어 가사가 그대로 살아있는 음악으로 그것도 17일간의 장기공연을 한다는 것은 사실 모험에 가까웠다. 그 모험의 결과 우리가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얻었는지 지금부터 3주간의 기록을 정리해본다. 당장의 성과가 무엇이라고 제시할 순 없겠지만, 우리가 겪었던 착오들과 약간의 깨달음이 이후 에딘버러 프린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
2013 프린지 페스티벌의 공식 이미지 |
공연 외에도 준비할 것이 많은 에딘버러
모든 공연 기획이 그렇지만 해외 장기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전 프로덕션은 무척 중요하다. 공연장 섭외부터 항공편과 수하물, 현지 이동, 숙박, 식사, 공연장의 기술 문제, 그리고 축제 기간 중에 진행할 여러 가지 홍보 아이디어와 계획을 세우는 일까지 준비할 일은 생각보다 많다. 프린지 페스티벌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곳이니만큼 모든 과정을 단체가 책임져야 한다. 모든 실무를 단체의 내부 역량으로 소화할 수도 있겠지만, 현지사정을 잘 아는 에이전시와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다. 에이전시의 비용도 수백부터 수억까지 너무나 다양하기에 자신들의 상황과 목적에 맞는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몇 해 전 국내 쇼케이스에서 인연이 생겼던 한국인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고 극장과 소통하고 현지 상황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항공편의 경우 김포에서 출발해 베이징,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에딘버러로 도착하는 여정의 항공편을 예약했는데, 보통 인천에서 출발하는 1회 경유 항공편에 비해 백만 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었다. 또한 항공편으로 에딘버러에 도착하는 것이 런던에서 열차를 타는 여정보다 비용도 저렴하고 수하물 이동도 수월하다. 숙박의 경우 공연장과 숙소의 거리가 멀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도보가 가능 거리의 숙소를 구하는 것이 좋다. 축제 기간에는 페스티벌 플랫(Festival Flat)이라고 하여 가정집을 장기간 임대해주는 부동산들이 많은데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면 굉장히 많은 선택지들을 볼 수 있다. 호텔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며 잘만 구하면 꽤나 분위기 있는 유럽식 가정집에서 생활해 보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플랫의 또 다른 장점은 제대로 된 취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음식은 높은 가격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맛으로 악명이 높은데 마트에서 장을 봐서 취사를 할 경우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식사를 즐길 수 있다.
|
3주간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졌던 아름다운 주방 |
우리에게 허락된 홍보 수단은 두 다리와 목소리뿐
페스티벌 기간에 거리에서 특이한 차림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축제의 장이 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과 작품을 홍보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특히 프린지 페스티벌의 공식적인 메인 스트리트라고 할 수 있는 로얄마일에는 많은 예술가들과 그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로 엄청난 인파를 이룬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게 아니다. 또 경쟁의 과열을 막기 위해 프린지 사무국에서는 앰프를 이용한 시끄러운 거리 홍보는 금지하고 있다. 물론 자본을 투자해서 미디어와 거리의 광고를 살 수도 있겠지만, 자금이 부족한 우리 같은 처지의 예술가들에게는 엽서 크기의 전단지와 주목을 끌만한 의상의 겉모습,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할 두 다리와 목소리가 허락된 홍보 수단의 전부다.
고래야가 준비한 홍보용 의상은 전통과 현대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믹스매치였다. 한국의 음악이라는 특이성을 보여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두루마기와 갓 가체와 부채를 사용하긴 했지만 전통 국악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우리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선글라스, 구두, 정장을 믹스해서 최대한 튀는 모습을 만들었다. 또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어쿠스틱 악기의 사용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제가 없기 때문에 걸어 다니면서 연주가 가능한 기타와 소금, 꽹과리를 활용해 퍼레이드 형식의 홍보를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한국적인 소품을 사용할 경우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공연 전단지를 나눠주며 진심 어린 말로 공연에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홍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단을 나눠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수 천 개의 공연 중에 그날 볼 공연을 선택해야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예술가들에게 직접 받은 전단지는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전단을 나눠줄 당시에 그 사람에게 받았던 인상과 또 그 순간 우리가 연주하고 있던 음악의 느낌은 분명히 공연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신기하고 고맙게도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 중에 몇 명은 반드시 그날 우리의 공연에 찾아와 주었다.
|
거리 홍보를 위해 로얄마일로 향하는 고래야 |
또 하나의 공연, 버스킹
프린지 페스티벌에는 자율적인 거리 홍보와 별도로 거리에서 공연할 수 있는 버스킹의 기회도 제공된다. 사전에 신청을 받고 거리에 설치된 작은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것인데 약간의 비용이 들어간다. 장점은 축제를 찾는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공연을 말이 아닌 실제 음악으로 보여주고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CD를 팔 수도 있고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주는 공연료를 받는 것도 가능하다. 고래야는 첫 주와 두 번째 주에 두 번씩 총 4번의 공식 버스킹을 진행했다.
축제 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버스킹 공간이 아니더라도 에딘버러 시내 곳곳에는 버스킹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많이 있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거리 공연자들은 사무국의 관리와 무관하게 도시 곳곳을 떠돌며 공연을 진행한다. 현지의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면 그러한 버스킹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도 극장 주변에서 몇 차례 버스킹을 시도했다. 사무국에서 지정해 준 장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니지만 더 긴 시간 동안 자유롭게 우리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편한 부분도 있었다.
|
로얄마일에서의 버스킹 |
|
에딘버러 성 앞에서의 버스킹 |
Review and Star
거리 홍보를 통해 관객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가장 궁극적인 홍보는 좋은 공연으로 소문이 나게 하는 것이다. 극장 스태프들과 언론의 리뷰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한다. 3주간의 축제기간 동안 올해 주목할 만한 공연은 첫 번째 주에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주에 좋은 리뷰를 받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프린지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유명한 단체의 작품이든 전혀 새로운 단체의 작품이든 똑같이 평가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정말 많은 매체의 기자들이 움직이면서 더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기자가 언제 우리 공연을 보러 올지는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고래야의 경우에는 본 공연이 들어가기 전 프리뷰 기간에 어느 기자가 공연을 보러 왔는데 덕분에 첫 주부터 별 4개의 리뷰를 얻고 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매우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리뷰를 얻으면 포스터에 별 점을 인쇄해서 붙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뷰가 붙은 포스터와 그렇지 못한 포스터가 나란히 걸리게 되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고래야는 첫 주에 쓰리 위크(Three Weeks)에서 별 4개, 두 번째 주에 브로드웨이 베이비(Broadway Baby)에서 별 5개, 마지막 주에 헤럴드 스코틀랜드(Herald Scotland)에서 별 4개의 리뷰를 얻었다. 기분이 좋았던 것은 우리의 음악을 단지 한국의 이국적인 음악으로 보지 않고 밴드 전체의 사운드 앙상블이나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Norwegian Wood)’을 번안한 시도처럼 좀더 대중적으로 다가가려는 의도를 정확히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고 리뷰가 쌓이면서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처음에는 거리홍보를 통해서 만난 적은 수의 사람이 관객이 전부였다면 나중에는 리뷰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3주 차부터는 객석에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고래야는 미리 계약된 부산 공연 일정 때문에 마지막 주 공연은 전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귀국했는데 전체 일정을 다 소화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
리뷰가 붙은 고래야의 공연 포스터 |
3주간 17회의 공연이 가져온 변화와 깨달음
3주간 17회의 공연을 하면서 고래야는 확실히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세팅-공연-철수로 이어지는 60분의 시간에 익숙해졌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프린지에서는 극장에서 사용하는 1분의 시간도 모두 비용으로 계산되는데 우리가 구입한 60분 슬롯은 5분 동안 음향작업을 포함한 모든 세팅을 완료하고 50분간 공연을 진행하고 나머지 5분 동안 다시 처음상태로 철수를 해야 했다. 1분이라도 늦으면 다음 공연팀의 일정에 피해를 주게 되므로 페널티를 물게 된다. 한국 공연장이라면 반나절은 족히 필요할 일정을 5분 안에 소화하는 것이 프린지에서는 가능하다. 물론 그렇기 위해서는 각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배분이 필요하며 한국에서 미리 세팅과 철수에 대한 연습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아니면 조금 더 비용을 들여서 리허설 시간에 필요한 슬롯을 구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고래야의 경우에는 작은 공연장이어서 타악기 마이킹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또 한가지 고민은 영어 멘트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처음에는 말을 최소화하고 음악만을 보여주려고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멤버 중에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 공연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멘트를 하지 않고 음악만 들려줄 경우를 대비한 연주부분에서 준비가 부족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언어적 재미를 추구하는 코미디나 카바레 장르가 주류를 이루는 프린지에서 노랫말로는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의 음악이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영어멘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별 4개 리뷰를 받고 나서 다음 주에 별 5개 리뷰를 받게 된 것도 그 부분을 어느 정도 개선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또 해외공연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통과 진행에 대한 부분은 좀 더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딘버러에서 보낸 3주간의 시간 동안 고래야가 무엇을 얻었는지를 물질적으로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3편의 리뷰를 얻었고, 많은 공연 관계자들이 우리 공연을 보고 갔다. 밴드형태로 첫 장기공연을 하면서 멤버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 선다는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고, 아무런 인지도가 없는 상황에서 기획과 홍보의 모든 과정을 직접 소화하면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고 지속되는 과정의 어려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에딘버러를 다녀오기 전과는 조금 다른 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앞으로 우리의 공연을 통해 설명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
극장 공연 모습 |
또 한가지 느꼈던 점은 한국의 공연 수준이 전반적으로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올해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참가한 한국 공연들은 대부분 호평을 받으며 선전했다. 사실 이미 글로벌한 사회로 접어든 시대에, 에딘버러에서 한국과는 전혀 다른 신선함을 기대하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에서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은 프린지와 세계 마켓에서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세계시장을 겨냥한 특별한 형태에 대한 고민보다 현재 우리사회에 어울릴 좋은 작품에 대한 고민이야 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글로벌한 방향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