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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MS Choice] 시, 나, 꿈, 몸. (詩, 我, 夢, 身.) 2013-06-26

시, 나, 꿈, 몸. (詩, 我, 夢, 身.)
[PAMS Choice] <가곡실격: 나흘 밤>의 박민희


가곡,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가곡’을 아는가? 한국의 전통적인 노래를 ’가곡’이라 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구전무형유산’의 하나다. 하지만 가곡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하기에, ’가곡’하는 사람은, 다음 두 가지에 무척 예민하다. 내가 만난 ’박민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또한 아래의 두 가지 오해에 대한 에피소드로 말문을 열었다.

첫째, ‘가곡’은 한국의 ‘전통적인’ 노래인데, 한국의 ‘근대적인’ 노래를 가곡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가곡(歌曲)은 분명 전통적인 노래의 고유명사이나, 후에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서구에서 수입한 독일의 리트와 같은 노래와 이런 방식으로 만든 한국의 작곡가의 작품을 통칭해서 가곡이라고 불렀다. 실제 대다수의 한국 사람은 ‘가곡’하면 후자의 노래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전통적인 가곡을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악용어를 서구에서 들어온 장르에게 명칭을 빼앗긴 셈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같은 전통적인 성악을 한다고 해도, 자신은 가곡을 함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함께 취급할 때, 매우 민감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성악이라고 해도, 가곡과 판소리는 무척 다르다. 그러나 대중들은 판소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가곡을 하는 사람도 판소리와 같은 것으로 오해한다. 이럴 때도 가곡하는 사람들은 무척 기분 상해한다. 판소리의 뒤를 이어서, 가곡도 이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가곡은 한국인에게조차 낯설기만 한 장르다. 가곡을 하는 인구는 많지 않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으나, 같은 전통성악인 판소리를 하는 인구와 실제 활동하는 가곡인구를 비교하면, 99:1 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거다. 그래서 가곡은 귀한 존재이고, 가곡은 안타깝게도 미미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가곡’이라는 ‘장르’ 자체

‘가곡’을 하는 박민희를 만났다. 그녀는 여느 가곡을 하는 사람과 같았다. 일단 ‘가곡’이란 얘기가 나오면,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라는 자괴감에서 나오는 흥분된 어조였다. 그런데 그녀는 여느 국악인 혹은 가곡인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국악인을 99명이라고 치자. 그들은 모두 자신을 인터뷰를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스승’을 먼저 거명했다. 존경과 사랑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스승과 자신을 언젠가는 등치시켜 주기를 바라는 내심을 읽을 수 있었다. 무대에서 ‘계보’를 내세우면서, 스승보다 훨씬 못하다는 ‘겸양’을 강하게 내세우는 건, 한국의 전통 성악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딱 1명의 박민희는 계보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예술가였다. 박민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가곡’을 좋아할 뿐이다. 가곡의 계보가 어떻고, 가곡을 하는 사람이 어떤지, 이런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없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인터뷰 중인 박민희 작가와 윤중강 평론가

인터뷰 중인 박민희 작가와 윤중강 평론가

박민희가 인식하는 가곡은 ‘시’였다.

박민희는 왜 가곡에 끌렸을까? 가곡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릴까? 그는 ‘가곡 = 시’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그가 인식하고 있는 ‘시’는 무엇일까? 시가 갖고 있는 ‘형식’ 이상으로, 그는 시가 담아내고 있는 ‘정서’를 더 중요시하는 듯 보인다. 운율도 물론 관심이 있겠지만, 시 속에 담겨있는 감정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시’는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내면이 들어나는 ‘은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정서를 가곡이라는 다소 ‘환상적인’ - 그녀의 작품은 ‘꿈’으로부터 출발한다. -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해 보였다.
이번 팸스 초이스에서 선정된 박민희의 작품 ‘가곡실격’도 바로 이렇게 ‘시’로 출발한다. 그는 시를 자신을 은밀하게 드러내는데 적당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시’를 나흘간의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려간다. 그리고 그런 일기는 바로 그녀의 ‘꿈’에서 나타난 것들이다. 박민희는 이렇게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박민희라는 자아(自我)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녀는 ‘가곡’이란 장르를 자연스레 가져오고, 관객들이 그런 ‘가곡’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주길 희망하는 거다.

박민희를 인터뷰를 하다보면, 이런 ‘시’라는 단어와 함께, 한국어의 한 음절이 무척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셋이란 ‘나’, ‘꿈’, ‘몸’이다.

박민희 공연 속의 주인공은 박민희 자신이다. ‘나’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가곡’을 내세우고, ‘스승’을 내세우고, ‘전통’을 내세우는, 국악계의 일반적인 방식과 무척 다르다. 박민희의 공연 속에 존재하는 박민희, 곧 ‘나’는 이 시대의 고만고만한 젊은 여성이다. 굳이 특별할 게 없는 여성이다. 트렌드에 휩쓸리고, 남자 때문에 잠도 설치는, 악몽도 꾸는 그런 여자다. 그런 ‘나’를 ‘가곡’을 매개로 해서 그려나간다는 점이 특이하다.
언제나 ‘가곡’이 등장을 하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200년 전, 300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하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가곡은 조선시대의 노래라는 인식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일종의 팜므파탈 ‘황진이’를 생각한다거나, 이율곡이라는 인재를 길러낸 현모양처의 모델인 ‘신사임당’과 같은 인물을 연상한다.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캐릭터적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박민희가 그려내는 여인상은 시대적으로, 캐릭터적으로,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 박민희의 공연에는 이 시대의 보편적 여성이 있다.

박민희는 ‘꿈’에 대한 애착이 있다. 팸스 초이스에서 만나는 작품은 더욱 그렇다. 그의 꿈과 연결되는 단어는 두 가지. ‘꿈’이라는 것은 ‘희망’이다. 꿈‘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박민희는 자신의 일상을 이렇게 ‘꿈’을 통해서 비틀기도 하고, 현실에서 불가능 한 것을 직시하기도 한다. 이런 ‘꿈’에 대한 집착을 보면, 그 꿈이라는 ‘환상’과 ‘희망’ 사이에, 박민희도 있고, 가곡도 있음을 확연하게 감지하게 된다.

박민희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몸’이란 단어와 연결될 때다. 가곡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입’은 있으되, ‘몸’은 없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곡을 부르는 여성은 마치 ‘정지화면’, ‘스틸사진’과 같다. 가곡을 전통적으로 가장 잘 부르는 방식은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소리는 존재하지만, 저 소리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몸이나 모습을 통해서 전혀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민희는 다르다. 박민희는 몸을 통해서 가곡이 갖고 있는 선율감과 리듬감을 최대한대로 보여주려 한다. 내가 박민희라는 아티스트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때로는 ‘나’와 ‘꿈’을 내세우는 박민희가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비추다가도, ‘현실’을 ‘꿈’이라는 ‘틀’에 갇혀 놓고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안타깝거나 답답하다가도, 이런 가곡을 이렇게 ‘몸’으로 형상화하는 모습을 보면, 박민희라는 젊은 아티스트가 꽤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박민희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전통예술인 ‘가곡’을 복합장르인 ‘가곡실격’으로 성장시켜 놓았다고 보인다.

특히 ‘몸’에 관한 박민희의 사고와 행위는, 한국의 전통적인 - 특히 ‘여성적’ - 인식과는 상반되는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한국의 전통적인(유교적인) 사고방식에선, ‘몸’과 ‘마음’은 분리된다. 극단적인 이분법이 허용된다면, ‘몸’은 욕망의 분출이요, ‘마음’은 그에 대한 제어라고 해도 된다. 흔히 가곡은 ‘인격 수양’을 위해서 부른다고 얘기된다. 가곡은 노래이지만, 이렇게 명분을 강조하는 상황에선 ‘가곡’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성이 중시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전통적인 가곡은 ‘오럴’을 통해서 ‘모럴’을 지향한다고? 박민희는 ‘시’처럼 인식하고 있는 ‘가곡’을, 자신의 몸을 매개로 표현해낸다. 우선 ‘꿈’을 적은 ‘일기’를 가져와서 그런 ‘문자’ 텍스트를 ‘노래’ 텍스트로 바꿔낸다. 그리고 그걸 궁극적으로 ‘육제’ 텍스트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민희에게 있어서 ‘가곡’이란 궁극적으로 ‘신체 퍼포먼스’를 위한 중요한 ‘텍스트(교과서)’가 되는 셈이다.

가곡실격 : 나흘 밤

가곡실격 : 나흘 밤

가곡실격 : 나흘 밤

현대화라기보다는 가곡에 대한 일종의 ‘번역’

이런 박민희이지만, 그는 가곡의 ‘현대화’, ‘대중화’란 용어를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그는 가곡을 ‘변화’ 내지 ‘발전’ 시킨다는 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작업을, 가곡에 대한 일종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가곡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걸 현대인에게도 가능하게 위해서, 그만큼의 언어로, 혹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을 보여주는 게 박민희가 만들어낸 가곡실격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나, 박민희의 공연은 볼만하다. 첫째, ‘가곡’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서양식 화성, 서양식 악기 등으로 치장해서 알려주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능한 ‘가곡’ 그 자체 - 소리에 대해서 다른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는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둘째, 아티스트 자신인 ‘나’를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건 때로는 우월감으로 때로는 열등감으로 나타난다. 그런 박민희를 보면서, 결국은 저 모습이 궁극적으로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무엇보다 박민희는 ‘나’를 내세우지만, 그 ‘나’를 내세운다는 것이 결국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외침이란 걸 안다. 그 방식이 때론 서툴더라도, 그런 방식을 통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이건 바로 ‘박민희’뿐만 아니라, ‘가곡’이란 장르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박민희의 공연을 통해서, 우리는 박민희를 보고 가곡을 본다. 더 나아가서 ‘나’를 보고, 시행착오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찾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꿈’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하고 단정한 몸을 통해서 펼쳐지는 거다.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오래전부터 불렸다는 ‘가곡’이라는 노래다. 희소성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가곡과 그 가곡을 노래하는 박민희! 그녀가 가곡을 매개로해서 가곡의 그 희소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업은, 현대예술 혹은 복합장르가 갖고 있는 딜레마인 것 같기도 해서,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가객 박민희

가객 박민희
  • 기고자

  • 윤중강_평론가,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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