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에 뮌헨과 베를린에서 보낸 열흘간의 체험은 국제교류의 파트너로서 독일의 동시대 문화와 연극이 2013년 대한민국의 동시대성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본질적인 화두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시간들이었다. 지난 호에서 다룬 국공립 주요 기관과 협회 방문, 유서 깊은 극장들과 주요 공연들이 그러한 고민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덧붙여 주류 연극계와는 다른 전위로서 혹은 서브컬처로서의 언더그라운드 신과 젊은 예비연극인들을 교육하고 있는 대학의 연극교육에 대해서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짧게나마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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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부르거(Kaffe Burg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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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붙은 포스터, 68혁명을 기념하는 언더그라운드 밴드 콘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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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극 트렌드를 견인하는 언더그라운드 무대
주류 연극계의 흐름과 달리 언더그라운드 연극과 서브컬쳐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독일의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숨겨진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독일연극은 전통적으로 진지한 담론 중심의 철학적인 연극이 주류를 이루지만, 브레히트에게 영향을 미친 칼 발렌틴 같은 정치적 광대들의 풍자 마당이었던 언더그라운드의 카바레나 클럽 등에서 펼쳐진 코미디나 음악극, 퍼포먼스 형식의 레뷔 등 유쾌 발랄한 비주류 연극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독일이라는 국가와 민족이 공적인 세계에서 오도된 역사나 왜곡된 진실과 광기 서린 전체주의적 망상에 빠져들 때마다 카바레나 클럽 같은 사적인 공간에서 자유로운 예술형식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 의식을 드러내며 동시대 삶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했다. 이러한 정신의 발현은 68혁명을 거치면서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변화와 개혁을 선도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정신의 발현을 통해서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폴크스뷔네 (Volksbühne)나, 샤우뷔네(Schaubühne)를 오늘날 세계 연극의 전위로 이끌어간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한 시대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생하고 있었고, 분명 다가올 새로운 세대의 연극인들이 성취하게 될 새로운 연극의 모태가 될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인 카페 부르거(Kaffe Burger)는 구 동독 지역에서 통독 이전부터 유서 깊은 음악클럽이었고, 바로 근처에 자리한 스탠딩 코미디클럽 쿠카부라(KooKaBuRra)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을 방문하여 젊은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과 짧은 교감을 가져보았다. 일명 러시안 디스코 & 러시안 소울(Russian Disko & Russian Soul)이라는 자신들의 고유의 앨범으로 클럽을 운영하는 언더그라운드 클럽 카페 부르거(Kaffe Burger)는 구 동독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통독 이후의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토론회, 대안적인 펑크음악과 비주얼 아트 상영 등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대한 고민과 그에 맞서는 문화적 자생력을 꿈꾸는 대안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진 아날로그적인 클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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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클럽 쿠카부라(KooKaBuR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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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에 위치한 로자 룩셈부르크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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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토요일 저녁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여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로 스탠딩코미디클럽 쿠카부라(KooKaBuRra)였는데,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가 결합된 B급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포스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매일 저녁 색다른 레퍼토리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날은 인도계 독일 이주민인 코미디언이 영어로 자신의 눈으로 본 베를린에 대해서 성토하는 블랙코미디를 선보였다. 또한 그로테스크한 분장과 기괴한 의상을 입은 다양한 동시대의 광대들이 무대에 서기를 기다리며 때로는 배우로 때로는 관객으로 클럽 안의 열기를 가득 메웠다. B급 공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연이었지만, 내용 속에서 비치는 구호나 선언 같은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퍼포먼스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동시대 문제를 가지고 노는 젊은 예술가들의 재기 발랄한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다분히 아마추어적인 공동체로서의 클럽문화는 오래전 1930년대 베를린 다다-초현실주의자들의 놀이터인 카바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언더그라운드적인 도발성은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에 우뚝 서서 여전히 동독(OST)이라는 푸른 네온글씨와 극장의 깃발을 펄럭이는 폴크스뷔네(
Volksbühne)의 자긍심처럼, 아직은 자본주의의 상품미학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는 동독지역의 특성인 듯도 보였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아직은 물가가 싸고, 그리 세련되려고 애쓰지도 않고, 여전히 투박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에, 젊은 예술가들의 살아있는 ‘날것’들이 여전히 펄떡거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듯했다.
교육시스템을 통해 본 독일 연극의 동시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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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예술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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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부슈 연극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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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자유대학 |
짧은 일정 가운데 시간을 쪼개서 방문해 본 베를린 주요 대학교의 연극 관련 학과들도 현재 독일연극의 교육시스템과 주요 접근법을 파악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베를린 예술대학’은 전공의 세분화와 전문성을 강화하는 특성이 있었다. 특히, 배우 연기술 가운데 음악적 능력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 돋보였고, 대안적인 연극적 글쓰기를 가르치는 극작과정이 눈에 띄었다. 도이체테아터
(Deutschestheater)에서 본 <무죄>의 작가이자, 세계적인 포스트드라마 작가인 데아 로어가 나온 학교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실기적인 특성과 학문적인 특성이 결합된 성격이 강했다. 이에 비해 구 동독 지역에 위치한
‘에른스트 부슈 연극학교’는 졸업 후 곧바로 연극현장에서 적응할 수 있는 실습형 교육적 성격이 강했다. 연기전공 전임교수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학교의 전통과 역사 및 커리큘럼의 특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배우연기 접근법으로는 주로 스타니슬랍스키의 후기에 나타난 심리신체적 접근법과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연기법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연기되어진 등장인물로서가 아니라, 배우 스스로가 자신이 맡은 등장인물과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이 근본을 이루었다. 그래서 배우는 등장인물을 연기하기보다는 배우 자신이 등장인물을 대하는 태도로서의 서사적인 연기접근법을 중요시 여김으로써 배우 자신의 세계관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소통의 접근법이 핵심을 이루었다. 이는 동시대 독일 연극이 보여준 서사적 담론을 연기로 드러내는 특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토마스 오스터 마이어가 교수로 재직 중인 연출과정에서는 소수정예로 자신의 작품을 구상하고 창조하는 워크숍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그 외에도
‘베를린 자유대학’은 인문학과 철학의 토대 위에서 연극학을 공부하는 융합형 이론 및 담론연구의 성격이 강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둔 늦은 밤에도 몇몇 교수와 소수의 학생들이 함께 작은 강의실에서 세미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학교별로 교육의 방향은 매우 개성적이었으며, 독일 연극 전반에 걸쳐 이들 대학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으며, 교육자들 또한 현장에서 작업이 활발했다.
현재 독일 연극은 독일의 세계적인 연극학자 한스-티스 레만의 주장처럼, 포스트드라마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작가들은 기존의 드라마의 틀을 넘어선 새로운 대안적인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고, 연출가들은 현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테마로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장으로서의 극장을 꿈꾼다. 무대와 객석을 넘어선 현실로 파급되는 연극은 드라마트루그를 중시하는 독일 연극의 철학적 배경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그리하여 현실을 전복시키는 상상력을 동반하여 현실에 대한 담론을 생성하는 현실 참여적 예술 행위로서의 성격이 짙고, 그러한 예술행위에 대한 관객 스스로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의식이 매우 높다. 이러한 독일 연극의 동시대성은 독일 사회 전반의 활력과 무관하지 않다. 급변하는 시대에 대한 대안을 찾는 능동적인 태도는 연극과 공연예술 전반에 걸쳐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국제교류의 파트너로서 독일 연극에 대한 담론분석을 통해 동시대 독일과 한국의 공통 관심사를 연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대 독일 연극의 키워드, ‘인식(Identification)’ & ‘통합(Unification)’
결론적으로 이번 방문을 통해 발견한 동시대 독일연극의 키워드는 ‘인식(Identification)’과 ‘통합(Unification)’이다. 베를린의 동시대 연극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정(Identification)’에서 출발한다. 독백과 대화를 통한 성찰적인 인간형이 주요 캐릭터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하며, 관객들에게 자신이 누구였고, 누구이며, 누가 될 것인지 묻곤 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등장인물이자 배우인 타자에게 적극적으로 대답하며, 관객 자신의 존재를 투영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서로 간의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타인의 정체성에서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술 행위란, 그러한 과정을 도와주는 중요한 미디어가 될 것이다. 타인의 정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통합의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로 통합해가는 새로운 가능성(Unification)’이 열리고 있고, 연극과 공연예술은 그러한 가능성의 공간이 되고 있다.
20세기 역사 속에서 독일은 파괴와 분열의 온상이었으나, 21세기 독일의 미래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한 화합과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모색으로 자본주의/사회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진행 중이다. 특히, 공동체적 삶에 관한 성찰의 장으로서 동시대 연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 보이며,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기존의 질서와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하여 21세기 세계 연극의 화두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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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의 집에서 전시 중인 사진전 ‘경계(Bord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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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념사진과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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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박물관 갤러리에 그려진 그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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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극과의 본질적인 소통을 생각하면서 한국 연극이 꿈꾸고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연극적 글쓰기를 성취할 수 있는 텍스트를 시도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독일사회와 한국사회는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사회적 담론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시공간을 겹쳐보려는 창의적인 연극작업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독일이라는 파트너의 특성에 맞게, ‘어떻게 교류할 것인가’라는 방법 이전에, ‘왜 교류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면에서 공감할 수 있는 대안적 글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근본적으로 드라마를 뛰어넘는 대안적인 글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일과 한국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여 형식적인 교류가 아닌 내용적인 교감으로 파트너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문화상호주의에 입각한 글로벌한 국제교류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인터내셔널한 국제교류가 되기 위해서는 이벤트가 아닌 협력 작업의 공감대를 얼마나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동시대 독일연극의 경향과 트렌드를 볼 때 어쩌면 그것이 가장 시대정신과 어울리는 교류방식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