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랍 연극의 발전과정
[동향] 중동 공연예술 특집 1
아랍 고유의 연극적 요소
아랍 세계에서 현대적 의미의 연극이 처음 공연된 것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기간 중이었다. 당시 이집트에 주둔한 프랑스 군인들을 위문하러 온 코미디 프랑세즈의 공연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아랍인들은 처음으로 서구 연극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현대 드라마가 전적으로 서구에서 도입된 것은 사실이나 아랍인들 사이에 드라마적 전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극적 요소를 가진 아랍의 문학 유산으로 대중적인 중세 연애 서사시의 드라마적 암송, 타으지야(Ta’ziya : 위로, 위안)라 불리는 종교 수난극, 그림자놀이극, 카라고즈(Qaraqoz:인형극)등을 들 수가 있다. 먼저 중세 연애 서사시의 드라마적 암송이란 ’시인’이 찻집의 손님들 앞에서 간단한 악기에 맞추어 운문과 산문이 섞인 이야기들을 극적으로 읊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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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공연포스터와 극작가들 ©Cairo Opera House |
드라마에 보다 가까운 타으지야(Ta’ziya)는 종교 수난극으로 정통 칼리파 시대의 4대 칼리파 알리(’Alī)의 아들이며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Ḥsayn)이 우마이야 통치 가문에 의해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당한 학살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이 극은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이슬람교의 양대 정파(政派)중 하나로 알리 가문의 추종자들)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들에 의해 후세인이 이슬람력으로 정월인 무하람(Muḥarram) 3일부터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 야지드(Yazīd)에 대항하여 싸우다 카르발라 전투에서 패한 애도의 날인 10일까지 공연되었다. 그림자극 (Khayāl al-Ẓill)은 그 기원이 인도라는 견해와 중국이라는 견해 두 가지가 있으나 12-13세기 중국에서 이집트로 유입되어 파티마왕조에서 성행하다가 오토만 터키 지배하에서 쇠퇴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한편, 19세기 이집트에는 카라고즈(Qaraqoz)라고 불리는 영국의 펀치 앤드 쥬디(Punch and Judy) 같은 터키어의 익살 인형극이 하층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상 아랍 문화유산 속에서의 연극적 요소들을 살펴보았으나, 아랍 문학사 측면에서 볼 때 그들 문학의 주류는 시였고, 그 외 다른 장르, 특히 드라마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 이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랍인들은 A.D. 9,10세기에 희랍철학 및 의학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소개하면서 희랍의 드라마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랍인들의 시에 대한 정열과 자부심이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을 야기한 점, 또한 유일신 알라가 아닌 많은 신들과 신화가 등장하는 희랍 드라마는 이슬람 신앙과 상치된 점, 여성도 대중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연극예술의 본질이 이슬람문화의 토양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환경적 요인 또한 간과될 수 없는데 물과 목초를 찾아 유목 생활을 했던 이슬람 이전의 베드윈 사회에서는 무대예술이 뿌리를 내릴 안정성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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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오페라하우스 홈페이지 이미지 ©Cairo Opera House |
현대 아랍 연극의 태동과 발달
1) 레반트 지역 연극인들
마룬 알-낙까쉬: 사업차 유럽을 왕래하며던 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절정기를 맞고 있었던 연극과 오페라를 관람한 후, 이런 극예술이 당시 조국의 사회 개혁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1847년 마룬 알-낙까쉬는 몰리에르에게
아흐마드 아부 칼릴 알-깝바니(1833~1902): 그는 시리아 출신으로 마룬 알-낙까쉬의 연극 활동에 자극을 받아 1870년대에 다마스쿠스에서 극장을 세우고 연극 활동을 하였으며, 오늘날 시리아 연극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연극 활동은 연극을 탐탁치않게 보았던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어 오스만 터키 정부로부터 극장 폐쇄 명령을 받기에 이른다. 결국 알-깝바니는 1884년 자신의 극단을 데리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연극 활동을 재개하여 20년 동안 활기찬 공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배우이며 가수이자 동시에 극작가였던 알-깝바니의 공적은 연극예술에 한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 아랍 문학 유산을 극화하려고 노력했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이집트는 물론 아랍 세계에 음악극을 대중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사아다 알라 완누스(Sa’dallah Wannous, 1941~1998): 그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극작가이자 연극 이론가로, 그로 인해 아랍 연극은 세계적 수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60년대 당시 아랍세계는 몇 개로 나누어져 있었고, 특히 민족주의로 인하여 서로 극심히 싸우는 양상은 너무도 침울한 상황이었다. 특히 이스라엘과의 1967년 전쟁에서의 아랍 패배의 충격은 아랍 정치연극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당시 유럽의 브레히트와 같은 정치적 극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연극이 아랍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정치 연극을 소개했다. 완누스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시도하려는 일환으로 즉흥연기, 라이브 음악과 노래, 스토리텔링 그리고 관중들과의 직접 대화 등을 소개했다. 이러한 가장 인상적인 방법을 통해, 그는 청중들에게 연극 관람 후 자유롭게 주제를 토의하고 구두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객들의 참여는 그 연극에 대한 평가와 비평 그리고 소규모의 사회적 현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2) 이집트 연극인들
유럽 연극이 이집트에 처음 소개된 것은 프랑스가 이집트를 점령하였던 짧은 기간(1798~1801)동안이었다. 1798년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침공과 그에 따른 서구 문물의 도입으로 그 문화적 토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인쇄술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도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대를 위문하고자 프랑스 희극이 카이로에서 공연되었는데, 이는 이집트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집트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은 아즈바키야 극장(Azbakiyya Theater)으로 1868년 외국 회사에 의해 세워졌고, 그 후 1869년 ’카이로오페라하우스(Cairo Opera House)’가 설립되고 많은 극장들이 들어섰다. 이때의 극장들은 외국 관광객들을 수용하기 위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중점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당시 이집트에서 연극을 이끌었던 인물은 야으꿉 산누와 오스만 잘랄이 대표적이다.
야으꿉 산누: 이집트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8개 국어가 넘는 많은 외국어에 정통했다. 그는 연극이 현대 이집트의 문예부흥에서 담당할 문학적 역할을 깊이 확신한 후, 1870년 자신의 제자들로 극단을 구성하여 공연하였다. 야으꿉 산누는 ’이집트의 몰리에르’로 칭호를 받았으나, 사회와 정부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인해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케디브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1872년 그의 극장은 폐쇄당하고, 얼마 후 프랑스로 추방되면서 그의 연극 인생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야으꿉 산누가 쓴 32편의 작품은 현실에 반항하는 이집트 농민과 민중의 삶, 서구식 풍속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어리석음, 여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미리 정해놓은 결혼, 엉터리 의료행위, 케디브의 폭정을 폭로하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룬다. 또한 이집트 방언을 사용하고 이집트적 주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를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운동의 핵심에 위치하게 하였으며, 이집트 민족 연극의 설립자로 평가받게 하였다.
무함마드 오스만 잘랄(1829~1894): 그는 당시 유럽 문화의 역작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중추기관이었던 번역학교(Madrasat al-Alsun) 출신으로 몰리에르의 희극들과 라신느의 비극들을 이집트 구어체와 구어체 민요시 자잘(Zajal)로 번역하였다. 잘랄이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중점을 둔 것은, 원작 본문을 아랍시 운율에 맞추거나 구어체 아랍어로 옮겨 표현하는 것 외에 번역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배경, 인물, 장면이 이집트에 맞도록 이집트화하여 프랑스 극을 그 언어와 정서면에서 완전한 이집트 극으로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잘랄의 활동은 그 시대에 분명 굉장한 행동이며, 그를 전술한 야으꿉 산누와 함께 이집트 연극의 발전을 이끈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우피끄 알-하킴(1898 또는 1904~1987): 타우피끄 알-하킴은 20세기 아랍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특히 연극 부문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한 ’아랍 희곡의 완성자’로 불린다. 1925년 법학 박사과정 수학을 위해 파리로 유학간 알-하킴은 그곳에서 서구문화를 접하며, 특히 드라마가 지닌 역할과 역량을 깨닫고 그것을 조국인 이집트 사회에 적용해 보기로 결심, 1928년 법학 공부를 중단한 채 카이로로 돌아왔다. 알-하킴은 70여 편의 희곡 작품을 썼는데, 그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에 따라 주지극, 사회극, 부조리극 등으로 구분된다. 그는 아랍 세계에서 처음으로 주지적, 철학적 주제의 희곡을 썼으며,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희곡의 뿌리가 유럽 주지극의 전통에 있음을 밝혔다.
1934년 이집트 정부는 연극 지원책의 하나로 국립극단을 창단하고 1935년 타우픽 알-하킴의 첫 번째 희곡 <동굴속의 사람들(Ahl al-Kahf)>(1933)을 개관 기념 작품으로 공연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 작품 외에도 그의 작품들은 그 복잡성으로 인해 무대 공연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알-하킴의 수준 높은 작품을 상연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으며, 관객들 또한 이 작품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알-하킴은 현대 아랍문학에서 희곡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그 어느 극작가보다 많은 기여를 했다. 유럽에서 수학한 그는 서구 문화와 자신의 문화가 충돌하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이집트적인 시각으로 서구의 희곡을 적용하였다. 그는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지성을 바탕으로 한 희곡을 썼으며 이는 현대 아랍희곡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지금까지 아랍 현대연극의 초기 발전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랍인들은 그들의 불안정한 유목생활과 이슬람문화의 영향 등으로 드라마가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으나, 서구의 드라마를 도입한 초기 아랍 연극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문화에 접목시켜 아랍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초기 현대 아랍 연극이 이집트를 중심으로 발전된 이유는 초기 레반트 연극인들이 보다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집트로 넘어와 연극 활동을 펼쳤으며, 많은 개화된 이집트 지식인들이 연극 활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