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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머니(Money), 둘째 아르장(Argent), 셋째는 돈!“ 2012-12-18

"첫째 머니(Money), 둘째 아르장(Argent), 셋째는 돈!"
 
[피플]이종호_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회장,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


지난여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글쓴이의 표현대로 ''오랜 망설임 끝에'' 보낸 편지였다. 일단 발송한 편지를 다시 보고픈 이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오랜 머뭇거림 후에 쓴 편지라면, 더욱 겸연쩍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편지를 공개하는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꺼림하지만, 유예(猶豫)에 대한 예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 일부를 옮겨본다.

오랜 망설임 끝에 여러분께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CID-UNESCO 한국본부의 활동을 좀 더 격려하고 도와주십사는 염치없는 간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활동을 해오면서도 가까운 분들께 조금이라도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후원을 부탁드리는 것을 큰 결례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영리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순수예술 분야의 활동을 짧지 않은 세월 계속해오면서 저의 그런 생각이 매우 비현실적인 것임을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략) 아름다운 축제 하나를 빚어내기 위해, 그리고 춤 문화의 사회적 확산과 한국문화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저희들이지만 한낱 민간단체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수시로 절감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일송 편집장과 이종호 예술감독
이종호_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회장 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

이 조심스러운 편지의 발신인은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이하 ''CID-UNESCO'') 한국본부 회장 겸 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SIDance'') 예술감독 이종호다. 본격적인 글의 시작에 앞서 간략하게나마 단체를 소개하는 게 수순일 터. 전 세계 180여 개 회원국을 가진 CID-UNESCO 한국본부는 국내 무용수들의 작품을 국제무대에 알리는 동시, 세계 각국의 수준 높은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1996년에 설립된 단체다. 올해로 15회를 맞이했던 국내 최대의 무용행사 ''서울세계무용축제''가 대표적 연례행사로, 외에도 이 단체에서는 ''세계음악과 만나는 우리 춤'', ''우리 춤 빛깔 찾기'' 등의 공연을 기획하는 동시, CID-UNESCO 한국본부는 국내무용가의 해외파견과 국제합작작품의 제작, 무용과 관련된 각종 학술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무용의 사회화 및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 또한 이들의 활동반경 내에 있다.

세 가지 결핍이 SIDance를 탄생시키다

조직의 수장인 이종호는 본래 1977년 코리아 헤럴드에 입사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무용에 관한 기사를 썼던 기자 출신. 그러던 1984년, 한 무용전문지를 통해 정식으로 무용평론가로 등단한 게 무용과의 질긴 연의 시작이었다. 이후 평론가로 오랫동안 무용계 안팎의 사정을 돌아보며, 국제무용계의 수준과 국내무용계의 수준 사이의 낙차를 절감한 그는 국내무용계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1996년 CID-UNESCO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하고, 드디어 1998년 제 1회 SIDance를 통해 그 결실을 보이게 된다.

"당시는 내가 평론가로 15년 정도 활동했던 때였다. 평론가로서 오랫동안 무용계를 관찰하다보니, 무용계에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더라. 첫째, 창작물들의 예술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다. 1998년에 국내에서 창작되었던 무용작품 중에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작품은 거의 한 편도 없었다. 몇몇 작품들이 아시아권에서 중상에 속할 수준이었다. 둘째, 무용인들의 사회의식, 역사의식, 시대의식이 미약했다. 그렇지 않은 무용가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의식이 희미했다. 의식이 없으니, 무용이라는 예술자체도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제적인 안목이 없었다. 세계 무용계의 흐름을 알고 있는 창작자들이 부족했다."

이 세 가지 결핍이 그로 하여금 SIDance를 시작하게끔 이끌었다. 하지만 사실 축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그에게 더 많은 재원이 허락되었다면, 무용전용극장을 건립했거나 문화재단을 설립했을 것이다. 축제는 자본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축제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후, 급선무는 수준 높은 해외작품을 유치하는 일. 피나 바우쉬와 쌍벽을 이루는 수잔 링케 등의 대가를 위시해 중견 안무가와 재능 있는 신인들이 SIDance의 무대에 섰다.


"축제 프로그램을 짜며 가장 중시했던 건 수준 높은 해외작품을 들여오는 일이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좋은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먼저 국내 창작자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고 싶었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다음으로 그동안 무용을 평가절하 했던 관객들에게 아직 국내 작품들의 수준이 낮긴 하지만, 무용 자체가 수준 낮은 장르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재미있는 작품도 있고, 감동적인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무용계사람들에게 국제적인 감각을 키워주고 싶었다. 국제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걸맞은 식견이 필요하니까. 거기에 충실한 프로그램을 짜려고 했다."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공연

그것은 유효했다. SIDance 이전에도 대가들의 내한공연은 없지 않았다. 그러나 SIDance는 단발성으로 끝났던 공연을 한데 모았으며, 워크숍을 통해 배움의 장을 마련하고, 나아가 심포지엄을 통해 현장의 이론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SIDance를 통해 진싱, 장-끌로드 갈로타, 인발 핀토, 앙줄랭 프렐조카주, 마기 마랭, 아크람 칸, 질 조뱅, 테로 사리넨 등의 대가들이 한국을 찾았다. SIDance가 무용계에 공헌한 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SIDance는 ''젊은 무용가의 밤''을 열어 젊은 무용가들이 스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지금처럼 젊은 무용가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이 생긴 건 SIDance 이후의 일이다.

"다른 많은 곳에서 젊은 무용가들을 위한 도움이 늘어나면서 ''젊은 무용가의 밤''은 폐지하게 됐다. 이후로 시작한 게 공공장소에서 춤을 추는 ''춤추는 도시'' 프로젝트다. 취지는 간단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연을 보러 찾아오게 만드는 게 아니라 찾아가서 보여주자는 게 첫 번째 취지였다. 또 한 가지는 안무가에게 공간을 새롭게 보는 안목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우리 안무가들에게 부족한 것 중 하나가 공간연출력이다. 만일 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공간을 연출할 기회를 준다면, 다채로운 무대연출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SIDance도 성장했다. 초창기만 해도 국제적 수준과 규모를 갖춘 무용축제로는 SIDance가 유일했다. 때문에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했다. 해외작품을 선보이는 한편, 국내작품도 선보이고, 신구의 조화도 꾀해야 했다. 덕분에 ''종합선물세트''라는 별명도 생겨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유사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가진 축제들이 SIDance와 비슷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축제가 국제현대무용제(이하 ''Modafe'')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이하 ''SPAF'')다. 세 축제 모두 현대무용 위주로, 해외작품을 소개하고 있다는 면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축제간의 차별성이 희미해졌다.

"다른 축제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힙합의 진화''를 기획했다. 그것은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자 춤 예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시도이다. 사실 Modafe와 SPAF에서 이미 전문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국제적 수준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난 실기전문가가 아니다. 난 관객 출신으로, 관객의 입장에서 모든 걸 생각한다. 그래서 축제의 작품을 선정할 때에도 일반관객의 시선에서 생각한다. 전문가가 보아도 좋은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일반관객이 볼 때도 어렵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려 애써왔다. 전문관객과 일반관객을 가급적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공연을 프로그래밍하려고 노력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떻게 축제를 지속시킬 것인가?

SIDance가 인정받으면서, 다른 업무들이 늘어났고, 업적이 쌓였다. 역시 가장 큰 업적은 국내무용수들의 해외진출이다. 국내 무용계의 기획인력이 부족하고, 아트마켓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 SIDance는 무용계 아트마켓 역할을 수행했다. SIDance 이전에도 해외진출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이 알음알음을 통한 개인적 차원의 진출이거나, 전통무용에 국한되어 있던 게 사실.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된 현대무용의 해외진출은 SIDance가 해외 무용계와 네트워크를 쌓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요즘도 해외에 업무 차 여장을 꾸리다 보면, 트렁크의 반 정도가 우리 무용가들 DVD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10개씩, 20개씩 자료를 배포한다. DVD 몇 백 장를 뿌려야만 겨우 몇 명에게 반응이 오지만, 그것도 신뢰관계를 구축되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해외무용제나 해외콩쿠르에 초청을 받아 가면,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이 나 혼자일 때가 비일비재하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니까 신뢰가 쌓이는 거다. 물론 나만의 노력으로 다 된 건 아니다. 국내 창작자들의 수준이 높아졌고, 정부의 지원이 늘어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열정에는 희생도 따랐다. 그렇다. 경제적 희생이다. 백조와 같다. 겉으로는 문화예술축제를 펼치는 고상한 보습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재원확보를 위한 발버둥이 있다. 물론 돈이 많다 해서 모든 축제가 훌륭한 축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축제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금은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최근 그의 가장 큰 고민도 거기에 있다.

"1998년에 축제를 준비하면서 여름에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의 집행위원장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Bernard Faivre D''Arcier)를 만난 적이 있다. 만나 세계적인 축제를 집행해본 경험자로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무엇인지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그가 그러더라. ''첫째, 머니(Money)다. 둘째는 아르장(Argent, 프랑스어 ''돈'')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돈이다.'' 그의 이야기를 두고두고 절감한다."

인터뷰의 초두에, 그는 ''SIDance는 거의 문 닫을 판에 와있다. 돈 때문이다.''라는 푸념을 꺼내 놓으며 말을 시작했다. 고사 직전의 SIDance를 살리기 위해, 그동안 CID-UNESCO 한국본부에서는 정부에서 발주하는 각종사업에 입찰하기도 하고, 외로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겨우 입에 풀칠을 면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난여름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동안 SIDance에 관심을 가져온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후원자들로 하여금 재원을 마련해보려는 의도에서였다. 개인과 단체의 후원 덕에 목표한 금액이 확충이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축제를 끌고 갈 세월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는 여전하다. 이제 지난여름 그의 편지에 늦은 답장을 쓸 때가 되었다. 누구나 편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답장의 내용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 이제 펜을 들어 답장을 쓰자.

  • 기고자

  • 김일송_씬플레이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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