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어렵지 않은
[W&W] 데이비드 플레져 _NYID(Not Yet It''s Difficult)예술감독
NYID 예술감독 데이빗 플레져를 인터뷰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약간은 망설였지만 다음순간 곧 승낙을 했다. 어쩌면 내 개인의 히스토리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 일 수 있기에 좀 부담스러웠지만, 그만큼 내가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잘 알려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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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플레져_NYID 예술감독 |
Q :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당신을 만난 것이 2005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일을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맡았던 국제 공동제작 프로젝트를 하면서였습니다. 우선 한국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설명을 좀 해 주세요.
A : 제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이 어언 20여년이 되어갑니다. 원래 아시아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 스즈끼 다다시와의 작업 등도 했었는데, 90년대 초 예술의 전당에서 초청받은 <리어왕>에 배우로 출연했을 때 당시 공연을 보러 온 김광림과 인연이 시작되었죠. 공연이 끝나고 만나서 밤새 마시며 예술 얘기를 밑도 끝도 없이 풀어나갔습니다. 전형적인 한국의 술 마시기로 인연이 시작된 것이죠. 이후 90년도 후반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초청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과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만났던 학생들과 지금까지도 인연이 이어져서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준비된 과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어진 인맥을 따라 오늘까지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Q : 이후 2005년 처음으로 한국과
A : 이 작품은 카프카의 <심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현대사회의 개인에 대한 감시에 대한 담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이민자에 대한 통제 등도 현실적인 모티브가 되었죠. 저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감시당하는 방식에 대해 멀티미디어를 사용하여 좀 더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얘기하고 싶었죠. CCTV가 공항에서부터 골목 어귀까지 들어오는 일상에서 개인은 알든 모르든 일거수일투족을 국가의 감시체계 아래 놓이게 되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한국과 호주 배우들과 스텝이 함께 두 가지 언어로 올리는 야심찬 시도였지요.
그 작업 과정은 지금 돌이켜 봐도 교과서 그대로였다. 먼저 프리 비짓(pre-visit)을 통해 극장을 정하고, 대본을 고치고, 오디션으로 팀을 짜고, 호주에서 연습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작품을 올리는 어찌 보면 단순한 과정을 교과서처럼 밟았다. 쉽지 않은 철학적 담론을 반복적으로 설명 하면서 데이빗은 천천히 팀워크를 만들어 갔다. 그 공연은 2005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공연되어 작지만 뜻 깊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관객도 무대 위에 앉히고, 입장하는 방식부터 국가에 의해 호명되는 개인의 자아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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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렇게 시작된 한국과의 작업은 시간을 두고 지속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극단 우투리와의 작업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주요 작업과 작품을 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세요.
A : 예, 저도 가끔 놀랍니다. 이들과의 인연이 이렇게 지속되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고요. 극단 우투리는 김광림이 그 전부터 시도해 오던 한국 전통의 현대화를 목표로 2006년에 창단한 극단으로 한예종 출신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도 다수 있었기에 제가 한국과의 공동제작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조연출이었던 변정주, 배우 서민성, 고기혁, 공상아 등은 한예종에 교환교수로 있던 당시에 수업을 했기에 저의 메소드에 이미 익숙해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관심을 가져오던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그 저력에 대한 믿음이 이제껏 한국과의 공동 작업을 해 오는데 바탕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2007년<스트래인지랜드 (Strangeland)>, 2008년<빼앗긴 자들 (Dispossessed)>, 2010년부터 해 온 <앰퍼샌드 (Ampersand)> 등 매번 작업의 양과 과정이 만만치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늘 재미있게 진행해 왔습니다.
Q : 그러면 이 시점에서 당신의 극단 NYID에 대한 설명을 좀 해 주시죠? 어떤 작업을 모토로 하시나요?
A : 극단 이름으로선 약간 생소할 수 있는데요, NYID는 ‘not yet it’s difficult‘의 첫 자를 따서 만들었습니다. 단어 자체로는 ‘아직은 어렵지 않은’이라는 의미인데,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를 반영하며 살아 움직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초반에는 주로 멀티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작업들을 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공간속에서 몸이 어떻게 매개자(agency)로 작동하는 지에 대한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멜버른 페더레이션 광장 (Federation Square)의 설치 작업과 국제 프로젝트(호주, 싱가폴, 프랑스, 독일, 한국) <앰퍼샌드 (Ampersand)>를 하고 있습니다. 그 형태와 규모는 다양하게 발전해 오고 있고, 장르에 대한 구분도 점점 더 확장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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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퍼샌드> 연습장면 |
Q : 어찌보면 우투리와 NYID의 작업 모토가 약간 다르게도 느껴집니다. 공동 작업 시에 어떤 점에 중심을 두고 진행을 해 오셨는지요?
A :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서 지향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투리의 예술적 퀄리티를 신뢰하고 그 구성원 각각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점들은 오히려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문제라기보다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Q : 당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A : 나는 나를 인터미디어(intermedia) 예술가라고 정의합니다. 공연예술과, 미디어 예술, 그리고 시각예술의 그 중간에 있으면서 이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의 ‘형식’보다는 ‘아이디어’에 집중해서 작업을 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형식적인 실험보다는 주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마치 그것을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굴려보면서 작품을 진행시킵니다. 그래서 때론 극장에 들어갈 순간 까지도 조바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디테일을 손 봐 갑니다. 예술가로서 저는 메인 스트림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세상에 반응하고 모험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Q : 이번 PAMS 아트마켓 피치세션에서 프리젠테이션 할 <앰퍼샌드>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시죠?
A :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2년 전 독일 드레스덴 헬레라우(Hellerau)극장에서 리서치를 하고, 작년 호주에서 2번의 워크숍을 거쳐서 다음 달 춘천에서 선보이게 될 작품인데, 뮤지션과 퍼포머들이 어떻게 신체를 통해 교감하는지를 탐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제가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신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감지하고 반응하는 가에 대한 궁금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1970년대 말 풋볼 선수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터디움의 운동선수와 극장의 배우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운동선수가 팀 플레이를 해나갈 때는 좌우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감지하며 경기를 풀어나가는데, 배우들이 극장이라는 공간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도 비슷하지요. 이런 은유는 또한 호주라는 광대한 대륙이 해안선에 둘러싸여 있다는 데까지 확장해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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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퍼샌드> 연습장면 _배우 서민성 |
Q : 당신은 서양인인데 왜 이리 동양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지요? 혹시 동양을 막연하게 동경하는 것은 아닌지요?
A : 물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시아, 더 정확하게는 한국에서의 경험이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제가 맞닥뜨린 한국은 어렵고도 낯설었습니다. 어떠한 기준이나 준거 집단이 없었기에, 서양의 논리로 교육받은 그가 읽어낼 한국의 환경은 너무도 애매하고 막연했습니다. 곧 제가 그전에 가지고 있던 이전의 논리는 해체되고 그 자리에 추상적이고 통섭적인 기제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모더니티의 이분법이 삐걱거리면서 틈(friction)들이 보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작업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본 데이빗은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삼겹살과 김치를 스스럼없이 어울려서 먹는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다.
Q : 당신은 최근 동시대 예술의 본거지인 브뤼셀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이후 아시아와 작업하는 당신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A : 나에게 아시아는 첫사랑입니다. 유럽에서의 작업도 아시아에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작업은 문화교류가 아니라 예술입니다.
사실 데이빗이 한국과 호주의 문화예술 교류에 끼친 영향은 프로젝트를 넘어선다고도 볼 수 있다. 2005년에 호주 의회에서 PAMS 아트마켓을 모니터하는 미션을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2006년 다시 마켓을 방문하여 쓴 리포트에 한국과 중국을 주요 타겟 국가에 포함시키라는 조언을 했던 것이다. 그 후 5~6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과 호주의 국제 교류가 몰라보게 성장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변화가 한사람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요한 시작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리차드 기어를 닮은 훈남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