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아프로 포커스

윤한솔 연출가_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감각의 회복 2012-07-31

윤한솔 연출가_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감각의 회복
[Who&Work] 그린피그 _ 윤한솔 연출


지난 5월, 그린피그의 신작 <두뇌수술>(진우촌 작, 윤한솔 연출)과 <나는야 쎅스왕>(윤한솔 연출) 발표를 마치고, 현재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윤한솔 연출)의 10월 서울아트마켓 쇼케이스와 11월 도쿄페스티벌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윤한솔 연출을 만났다. 그는 ’당신들’이 말하는 ’잘’의 기준에 맞추어 하고 싶지 않다고 꾹꾹 눌러 말한다. 내년부터 조리사 자격증을 하나씩 딸 계획이라는 그의 요리가 어떤 맛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Q: 작품의 타이틀 속 ’의붓기억’ 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이 생소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의붓기억’ 이란?

A: 본 작품은 원래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제목으로 준비 중이었으나, 공연 바로 직전 프로그램과 포스터를 인쇄하는 당일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바꾸게 되었다. 우연치 않게 포스터를 인쇄하기 전날 밤, 손홍규씨가 쓴 『이슬람 정육점』이란 소설을 읽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소설 속에 ’의붓세상’ 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여기서 착안하여 ’의붓기억’ 이란 조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의붓’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장 익숙한 단어로 ’의붓자식’, ’의붓아버지’ 가 있다. ’의붓아버지’ 란,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사회적인 관계가 만들어진 상태이나, 실은 혈육의 아버지가 아님을 말한다. ’의붓기억’이란 것도, 교육 등 여러 환경을 통하여 우리의 기억인 것처럼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내 것이 아닌 기억들을 말한다. 자발적으로 선택하였든 아니면 그러한 기억을 갖도록 강제되었든 간에, 본디 나의 것이 아닌 기억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붓기억’ 이란 단어를 붙였다. 처음 이 작품에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제목을 붙였을 때도, 전쟁의 기억들이 억압되어 공공연하게 이야기되지 못했다거나, 혹은 기억들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억압되었다거나 하는 맥락에서 제목을 붙이게 된 것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 슬라보예 지젝 같은 학자들이 말한 ’무의식의 억압’과 같은 맥락에서, 내 것이 아닌 기억을 만들게 되는 기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윤한솔  

Q: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의 창작 배경,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하여 관객에게 던지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A: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하고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전쟁의 이야기들이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가 공식적 역사로 알고 있던 학습한 역사가 아닌,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미시적 역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배우들과 함께 한국전쟁과 관련된 서른 여권의 책을 발췌하여 읽고, 학살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을 수집하였다.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2010년을 살고 있는 전쟁 세대가 아닌 우리에게 전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에 한국전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후, 공식적 기억인 ’역사’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 사이의 괴리 안에서 헤매는 시간이 뒤따랐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은 북침이냐 남침이냐의 문제에서부터, 전쟁 당시 위정자들은 어떠하였는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전 4.3 항쟁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의붓기억-업악된 것의 귀환>을 작업하게 되었다. 민간인들이 경험했던 전쟁의 실상과 공식적 역사 간의 괴리와 차이를 이해하고, 왜 그러한 차이가 나는 것인지를 들여다보고, 기록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기억은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애도해야만 하는지를 고민하였다. 이는 단순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문제라기보다는 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감각을 회복해야하는 문제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망자들이 묻혀있는 땅을 내가 지금 밟고 서있다는 감각을 회복하고, 그 감각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에.

Q: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은 그린피그가 2008년 시작한 ’형식에 대한 지독한 반성’ 연작의 일환이다. 본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배경과 의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A: ’형식에 대한 지독한 반성’ 시리즈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두었던 작업이다. 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빈커가 없으면 나는 너무 외로워>를 춘천마임축제에서 2008년 초연하고, 같은 해 변방연극제에서 공연하였다. 변방연극제 공연에서는 아르코미술관과 마로니에 공원을 동시에 사용하여 진행하였는데, 미술관 안의 관객들은 마로니에 공원을 내다보며 공원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는 무관한 텍스트 음향을 듣게 된다.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은 동 시리즈의 두 번째 시도로, 토탈미술관을 배경으로 2010년 8월 초연하였다. 토탈미술관에서 작업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공간의 중층구조이다. 공연 중 배우와 관객이 지하로 한층 한층 내려가는 것은 시체가 묻혀있는 땅에 점차 근접해가는 과정이기에, 동선 자체가 은유적이다. 게다가 한 여름 미술관 내부는 굉장히 눅눅하고 습기가 많은 공간이다. 에어컨을 틀고 차고 문을 열어 환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관객들이 음습한 지하에 와있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으로 감각을 동원하여 공연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형식에 대한 지독한 반성’ 시리즈는 극 형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공간을 발견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장소 특정적 (site-specific) 작업의 일환으로 공간과 환경에 새롭게 접근한다는 맥락에서 연작을 기획해오고 있다. 아직 다음 연작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실험을 계속해나가려고 한다.

Q: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은 올 해 11월 도쿄 페스티벌 공연을 앞두고 있다. 공간이 달라짐에 따라서 작품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어떠한 재미를 기대할 수 있을까?

A: 공연 공간이 바뀌면 자연히 동선도 달라진다. 토탈미술관 초연 이후 창무포스트극장과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공연할 때도 동선이 달라졌다. 그 때 관객은 극장 안에 아무도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심지어 극장 관계자들의 발길조차 오랫동안 닿지 않았던 좁고 어둡고 습한 길을 따라 이동하며 공간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11월 도쿄 페스티벌 공연 장소는 옥상에 물이끼가 낀 수영장이 있는 폐교인데, 바로 그 장소에서만 할 수 있게끔 공연이 바뀔 것이다. 일본 배우 5명을 캐스팅하려고 하는데, 전쟁이나 사라진 공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배우들을 찾아달라고 요청 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공연 속에서 장면화, 대사화 될 것이고, 이로써 새로운 맥락이 생길 것이라 기대한다.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  

의심하고, 응시하기

Q: 그린피그는 그간 ’이주’, ’소수자’, ’종교’ 등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소재와 현상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발표하여왔다. ’형식에 대한 지독한 반성’ 시리즈 이외에도 여러 시리즈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A: 2011년, ’이주’에 관한 연작 시리즈를 마무리하였다. 2007년작 <나는 기쁘다>(이화진 작, 윤한솔 연출), 2010년작 <누가 무하마드 알리의 관자놀이에 미사일 펀치를 꽂았는가?>(안재승 작, 윤한솔 연출), 2011년작 <연변엄마>(박상현 연출)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우리가 작업한 각각의 작품이 반드시 하나의 시리즈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은 ’형식에 대한 지독한 반성’ 연작인 동시에, ’대한민국’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그린피그가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연작인데, 앞으로 국가보안법, 빨갱이, 헌법, 기독교 등을 주제로 5부작을 기획하고 있다.

Q: 앞에서 말한 정치․사회․역사적 소재로부터 ’대립’과 ’갈등’ 같은 개념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극단 구성원들이 이슈와 현상을 각각 해석하고, 의견을 공유하고, 주제와 맥락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고 실행하는 지고지난한 과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작품 창작을 위한 작업 방식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A: 모든 공연이 그렇듯 우리의 작업은 힘들고, 특히나 연습기간이 긴 것은 확실하다. 3달 이상 연습을 하고, 공동창작 같은 경우는 4달 남짓 연습한다.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은 배우들과 책 읽고 공부하는데만 1달 반이 걸렸다. 작업을 시작하면 대본이 정해지더라도 독서와 강연 등을 통하여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꽤 길게 거친다. 반면 대본을 읽고, 배역을 정하고, 리딩을 하고, 연기와 연출을 하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짧다. 배우들 스스로도 하려던 이야기에 대하여 잘 모르면 작품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인문학적인 이해 없이 하는 작업이 재미없다고 한다. 공동창작 뿐 아니라 그린피그의 모든 작업이 이러한 방법론과 과정을 거쳐서 진행된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의심하는 훈련이다. 의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작업 과정 중에 동료들 간에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를 조율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연출인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배우에게는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하라고 요청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 배우가 나의 이야기에 설득 되는 경우도 있고, 나 자신이 배우에게 설득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그것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함께 한 과정이 공연 중에 어떻게 보이냐가 중요할 뿐. 무대 또는 공간에서 수행하는 공연 자체도 의심하고 탐구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함으로써 의심에 대한 해답을 찾거나, 어떠한 형식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 작업 중 힘들었던 점 중 하나는, 문명을 피폐하게 만드는 전쟁의 잔혹함에 대하여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으나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곱게 하고 싶지 않았고, 관객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앉아서 공연을 보게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이런 미학에 동의하지 않고, 관객은 공연 관람 중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가 공연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배우들의 에너지와 태도로 드러났으면 한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

Q: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A: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직업의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물질로서의 토대, 즉 식생활과 삶에 필요한 의식주에 관계된 것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럼 예술을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일차적으로는 나와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 갖는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이주민들의 불법체류에 대한 단속이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그들이 없으면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은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러한 호기심이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응시하게 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작업은 처음에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고발과 분노로 시작을 하였는데,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다 보니 기억과 감각의 문제로, 구조와 현상에 대한 통찰로 확장되었다. 이주 시리즈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이주노동자들의 파괴된 인권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에서 시작하였다. 이주노동자 센터와 집회를 찾아다녔고, 그 과정 중 100년 전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 1970~80년대 독일로 파견된 한인광부들의 삶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단순하게 누가 누구의 인권을 탄압하는가의 문제에 집중하여 이를 고발하는 것이 아닌, 이주 자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안에서도 젊은이들이 지방에서 대도시로, 그것도 서울로 이주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자본의 문제와 연결된다. 지방에는 편의점도 많지 않아 젊은이들이 아르바이트할 곳도 없는 것이 실정이다. 그곳에서는 최소한의 소비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한데, 서울로 이주하여 그 돈을 번다고 하여 삶의 질이 좋아지는가? 그것도 아니다. 이런 질문들을 하다 보니, 처음의 분노와는 다른 차원의,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조금 더 깊이 있게 본질에 다가가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Q: 예술가로서 당신의 신념은 무엇인가?

A: 방송에서는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극장>이란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느 가족이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더라”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다큐를 보며 시청자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왜 같은 시공간을 살면서도 저렇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정하는 눈물을 흘림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인간극장 효과’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공연으로부터 꿈을 발견하고, 삶의 위안을 얻고 싶어 한다. 마치 <인간극장>을 보듯 무대와의 충분한 거리를 두고, 나는 무대 위 저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공연을 보고 싶어 한다. 이것은 안 좋은 것들이 고착화하는 데 이바지할 뿐, 이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예술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현실을 날 것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술만이 세상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무대 위에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한다.

Q: 지금 의심하고 있는 것, 새롭게 탐구하고 싶은 주제, 던지고 싶은 화두가 있다면?

A: 연애 이야기를 늘 하고 싶었다. ’사랑’이 아닌 ’연애’ 말이다. 남자는 왜 여자보다 하등한가? 남자는 왜 자꾸 강요된 마초가 되는 것인가? 단순히 학교와 군대의 영향일 뿐 아니라, 똑똑한 여자들이 남자로 하여금 마초가 되도록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것들, 즉 일종의 성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성 정치학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연애이다. 끊임없이 실패하면서 왜 계속 연애를 하려고 하는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왜 해야 하는가? 단순히 섹스의 문제인가, 아니면 단순히 섹스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는 없는 건가? 그러면 삶이 조금 더 단순해지지 않을까?

  • 기고자

  • 구효진_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사업부 전략기획팀

korea Arts management service
center stage korea
journey to korean music
kams connection
pams
spaf
kopis
korea Arts management service
center stage korea
journey to korean music
kams connection
pams
spaf
kopis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