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아프로 포커스

쾌락에 대한 전략적 유머, <유압진동기> 2012-01-16

쾌락에 대한 전략적 유머, <유압진동기>
[포커스] 2011 페스티벌/도쿄 공연 리뷰


“스물아홉 살 때, 나는 나의 성생활에 남자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금형의 <유압진동기>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도입부의 이 고백만을 넌지시 일러준다면, 듣는 사람은 이 작품을 어떤 식으로 상상할까. 누군가는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함께 여성 투사처럼 씩씩한 아티스트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주인공을 극도의 남성혐오자로 상상하고, 그녀의 비장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흥분하고 제멋대로 욕망을 부풀릴지 모른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반응이 있겠지만, 여하튼, 주인공의 고백에는 이런 반응들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충분히 스캔들적인 울림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 이런 망상은 완벽하게 배반 당한다. 이 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관객의 욕망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

극장에 들어서면, 비교적 작은 무대 위에 큰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무대 왼쪽에 노트북을 펼친 정금형 자신이 무표정하게 앉아있다. 이 심플한 무대장치는 마지막까지 달라지지 않는다. 심플한 것은 무대장치뿐이 아니다. 한 시간 남진한 공연시간의 대부분을 책상에 앉은 정금형이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비추고 코멘트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극히 심플한 구성이다. 그렇게 설정된 작품의 첫머리에, 이 글 서두에 인용한 ‘고백’을, 무대 위 그녀를 통해 듣게 되는 것이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노트북의 화면에는 수많은 영상파일이 담겨있다. 관객은 침묵하고-하지만, 앞으로 혹시나 듣게 될지도 모를 과격한 스토리를 기대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크면 클수록, 마지막으로 가면서 뭔가 예상 밖이라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기대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것에 대한 투명하고 명석한 의지야말로 <유압진동기>를 관통하는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에 배반 당하는가. 이를 알고 싶다면, 서두의 ‘고백’을 다시 한 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무대 위의 정금형이 “자신의 성생활에 남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이른 경위나 내면적 이유 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이다. 무대 위의 그녀는 관객이 잠재적으로 품고 있을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근대’가 단순히 성을 금지하는 사회가 아니라, 성에 대한 담론을 무한대로 증식시키는 사회라는 미셀 푸코의 지적(『성의 역사』)은 여전히 타당하다. 그러한 메커니즘은 <유압진동기>의 객석에서도 작동한다. 관객이 알고 싶어 하고 대답을 듣고자 준비하고 있는 질문은 ‘당신의 성생활에 남성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된 데는 어떤 경위와 이유가 있는가’이다. 일견 그러한 관객의 욕망에 응답하려는 듯, 무대 위의 정금형은 딱 한 번 노트북 앞을 떠나 무대바닥에 누워, 마치 영상 속의 솔로 섹스 자세를 따라하듯 입을 다문 채 살짝 다리를 벌려 보인다. 에로틱한 대중소설이라면 심혈을 기울였을 그 클라이막스의 순간은 단박에 내팽개쳐지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스캔들’은 전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스캔들의 부재가 조용한 스캔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유압진동기>

쾌락에 대한 우화

얼핏 ‘자전적’으로 보이는 <유압진동기>는 실은 ‘쾌락’을 둘러싼 한 편의 짧은 우화이다. 또한, ‘쾌락’이 얼마나 그 자체로서 표상가능한가, 라는 난해한 질문에 대한 실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국가의 도덕에서든 정신분석에서든 ‘쾌락’은 우리의 현실생활 속에서 언제나 ‘보다 큰 문맥’ 중 일부로 분류되거나 종속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젠더조차도 단순한 조역에 불과하다. 성별(gender) 역시 쾌락을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억지스레 결론지어 담론으로서 유통시키고자 하는 폭력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인 세계관에서 ‘완전한 인간’이 성차를 초월한 양성구유자(Hermaphrodite)라고 한다면, <유압진동기>에서 일시적으로 획득되는 양성구유자적인 신체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인상을 준다. 어설프게 만든 흰 마스크로 표상되는 남성의 신체도,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 타이즈를 입은 여성의 신체도 쾌락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이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이다. ‘쾌락’에 있어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남성뿐 아니라 진공청소기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유압굴삭기를 주인공이 스스로 운전하고, 모래밭에 만들어져있는 거대한 여성상을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수는 장면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재현된 ‘타나토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관객이 은밀히 기대했을 선정적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그럼, 이 작품을 다 본 후, 관객의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관객이 그러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많은 관객에게 가장 인상에 남은 장면은 노트북 화면 속 정금형이 유압굴삭기를 운전하기 위해 마침내 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진심으로 환호하던 표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그 표정에서, 문득, 프로이트의 ‘유머’의 개념을 떠올렸다. 프로이트는 “유머란 쾌감 원칙에 따른 마음의 움직임 중 하나”라고 말한다(「유머」 1927). 많은 정신질환이 그렇듯, 쾌락의 원칙에 충실한 행위는 대개 마음의 건강에는 유해하다. 하지만, 유머만이 마음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프로이트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유머에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아닌, 마음을 북돋우는 성격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세계가 자아에게 고뇌를 강요하는 데 반해, 일종의 나르시시즘을 작동시켜 자아의 방어에 성공하는 것이 유머라는 것이다. 아마도 페미니즘 관점에서 <유압진동기>에서 보이는 (여성의) 정치적으로 나약한 힘을 비판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압굴삭기 면허를 취득한 그녀의 환희에 찬 표정에서는, ‘쾌락’이라는 개인적인 문제를 보다 큰 문맥에 종속시키려는 사회 메커니즘에 대항하는 유머의 승리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쾌락’을 둘러싸고 이토록 전략적인 유머를 조직해낼 수 있는 작품이 일본에서도 더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번역_ 고주영

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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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자

  • 모리야마 나오토 _ 교토조형예술대학 공연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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