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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 작가 _ 끊임없는 감각적 양식의 발명 2011-08-09
끊임없는 감각적 양식의 발명
[Who&Work] 임민욱 작가

이미 현대미술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임민욱 작가는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에서 선보인 두 작품 〈SOS-채택된 불화〉〈불의 절벽 2〉을 통해 공연예술계에도 알려졌다.

올해 서울아트마켓 팸스초이스로 선정된 <불의 절벽>은 장소특정적 퍼포먼스 프로젝트로 현재까지 버전 1, 2가 발표된 시리즈 공연이다. 이 작품은 다원이라는 장르의 범주를 떠나 ''작가''에 주목하게 된다. <불의 절벽>는 우리 공연예술의 일정 부분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작품의 문제의식이 형식이나 내용에 대한 치우침 없이, 혹은 그러한 틀을 과감히 깨고 문제적 현실과 예술적 구현으로 직진하고 있는 통쾌함이 주목되었다''는 심사위원들의 평을 받았다. 작가에 대한 이보다 더한 극찬은 또 있을까. 임민욱이라는 이름에 방점을 찍는 이유다. 인터뷰를 핑계 삼아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재발명된 소통의 형식

Q: 작업실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 얼마 전 미국을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궁금하다.

A:바로 중구청 옆이다 보니 작업을 하고 있으면 매일 재개발 보상 문제로 시위 노래가 울려 퍼지곤 한다. 어수선하지만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 미국은 내년 워커아트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개인전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사전 현장 답사 겸 회의 차 다녀왔다. 9월초 <멜랑코토피아>(Melanchotopia)라는 제목으로 로테르담 전시와 9월말 PKM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뜻하지 않게 올해 서울국제실험영화제에서 <불의 절벽> 시리즈가 상영될 예정이기도 하다.


Q: 과거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서 임민욱 작가를 소개할 때 언급된 키워드는 ''사람과 기억''이었다. 현재의 고민과 작품의 소재도 이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 지금의 창작활동은 어느 단계, 어느 시기쯤 와 있는 것 같은가.

A: 프랑스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일종의 개념미술의 선상에 있었던 것 같다. 아방가르드 미학선상에서 전복적인 제안들을 고민했었는데, 내겐 행정적으로 무엇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지금은 점점 ''장소성''이 배제된, 개별적 존재들이 가진 기억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었다. 즐겁지 않은 얘기들, 억압하고 암묵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 엄연한 현실인데 ''빛''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어둠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업에 열 카메라를 쓰게 된 것도 이 맥락에서다. 열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도 온도를 읽어내는 미디어다. 사람은 36.5도보다 높았을 땐 병이 생기고 더 낮으면 시체가 된다. 인간의 균형감각과 살아있음의 여부가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새삼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러한 온도와 잃어버린 촉각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 눈은 자연스럽게 열 카메라가 되기도 한다. 열 카메라는 주로 감시카메라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나의 작업은 그것을 전유한다. 지금 나의 작업 단계는 ''어떻게 볼 것인가(Seeing)''에서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는가''의 고민으로 해석된 터칭(Touching) 단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다.



<손의 무게> 로드무비 형식의 퍼포먼스. 열감지 카메라로 기록한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

<불의 절벽> 장소특정적 퍼포먼스 프로젝트. 스페인 마드리드의 200년 된 담배공장과 서울 용산의 옛 기무사 수송대터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됨.

 



Q: 당신의 작업을 보면 한 개인의 일상을 그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소통에 많은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임민욱에게 소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A: 사실 나는 소통을 꿈꾼다는 말에 불편함이 앞선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지려는 정치가나 통신사의 홍보전략 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굉장히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인데, 미술 작업은 작품 자체가 ''설명''될 수 없는 형용 이전의 상태를 간직하고 있다. ''말''로 존재하지 않고 일종의 ''말''에 저항하는 상태로. 하지만 다시 또 다른 ''말''의 가능성으로도 통한다.

나의 경우, ''두 마리의 토끼 잡으려다 다 놓친다''는 말을 한번 생각해본다. 나는 여기서 한 마리는 소통, 또 한 마리는 모든 논리와 합리주의의 포착에서 벗어난 녀석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둘을 다 잡고 싶다. 그래서 두 마리를 다 놓치고 없음을 확인한다. 작업은 그 없음의 확인이다. 그래서 다시 시도해본다. 하지만 두 마리 다 놓치는 연속선상에서 작업은 역설적으로 삶과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예술에 귀착된다.

소통,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내 관심은 소통에 어떤 형태를 만들어보는 것, 형식을 발명하는 것에 있다. 통신사와는 다른 소통혁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꾀와 형식의 발명인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아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말을 배운 다음에는 권력의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즉, 미적 판단을 저급, 고급 등으로 구분하는 것을 학습하기 시작하면서 소통이 한정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가운데 미학적 헤게모니에 반대하고 언어의 패권주의를 깨려는 노력이 창작활동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 노력은 형식의 발명과 맥을 같이 하지 않으면 물리적 소통은 가능할지언정, 지향점을 잃은 소통이 되고 만다. 지향점이 없으면 소통은 주위를 맴돌게 되고 결국 비루한 일상만 남게 된다. 누구나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시대라 전파하는 것은 손쉬워졌다. 하지만 정작 할 말은 못하고 누구나 해도 되는 말, 그래서 안 해도 되는 말, 못 들어도 그만인 말만 난무하고 전파된다. 예를 들어 색깔론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 아마도 그로인해 <불의 절벽 2>가 시도된 것 같다. 창작활동은 그렇게 소통에 대한 도전과 논리와 합리주의에 대한 회의를 동시에 표현하고자 한다.


비밀을 간직한 채

Q: 그렇다면 궁극적인 소통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A: 전파 매체는 발달했으나, 오히려 각자의 슬픔은 더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 슬픔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며 기대고 싶은 마음이 넘쳐나는 반면, 들어줄 데는 없다. 그런데 TV만 켜면 이젠 광고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눈물이 넘쳐난다. 하지만 예술은 자본의 스펙터클과는 다르게 슬픔을 들어주고 표현한다. 한편 사람들은 국가권력이나 공권력에 의해 짓밟혀진 개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것을 생존의 법칙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새 나의 작업은 그 하나의 삶을 기리는 형식과 의식을 발명하는 것과 닮았다고 본다. 상업영화가 해줄까? 방송매체가 그 슬픔을 껴안을까? 어떤 존재와 사물의 이면, 서술되지 않은 역사… 예술은 이 지점에서 비밀스러운 소통을 일으킬 수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껴안듯이…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지금 나의 작업에서의 바람은 춤추고 신나게 노래하는 사람에게도 감추어진 슬픔의 이면을 바라보며,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 아래에서 땅으로 꺼져버린 존재들이 있음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작업에서 일컫는 ''착한 야만인''은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Q: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고, 좀 더 발전시켜보고 긴 시간 소통되길 원하는 작품이 있는가.

A: <뉴타운 고스트>를 촬영했을 때 가슴이 뛰었고 〈SOS-채택된 불화〉때는 가슴을 졸였다. 최근 ''페스티벌 봄'' 프로그램으로 국립극단에서 선보였던 <불의 절벽 2>는 너무 슬픈 가슴으로 냉정을 다짐해야만 했던 경험이었고 여러모로 고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작가로서 매번 도전적이고 위험한 작업을 하면서 이 작업들을 통해 항상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계기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게 있다. 한편 이 작업들을 하면서 보편성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맥락이 제거된 미학적 판단을 통한 세계적 보편성에 대해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없다면 이 작품이 의미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말하는 세계적, 미학적 기준을 가진 작품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다.


Q: 언론의 지면이나 개인 블로그를 통해 여러 책에 대한 단상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무엇인가.

A: 존 버거(John Berger)의 책들은 미술학도들에게 참고서적으로도 많이 읽혀져 왔다. 그런데 이번 달에 그의 소설 『A가 X에게-편지로 씌어진 소설』을 소개하면서 다시 곱씹게 되있다. 약제사인 아이다가 반정부 테러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고 독방에 갇힌 자신의 연인인 사비에르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이중종신형은 죽어서도 관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형이다. 여자는 연인을 기다리는 자신의 삶과 일상을 묵묵히 기록하며 전달하고, 남자는 신자유주의로 가속화되는 불평등, 멕시코의 농민저항운동, 미국이 어떻게 전 세계를 부채의 수렁으로 몰아가는지 등에 대한 짤막짤막한 단상을 덧붙인다.

A와 X는 단순히 여자와 남자의 기다림, 헤어짐의 연애편지가 아니다. ''가장 사적인 감정과 전 지구적 차원의 정치, 경제 문제를 하나의 세계에 그려내고'' 있다. 다른 층위에 있는 존재와 언어와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구성이다. 내가 작업하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도 이질적인 것의 공존, 양면성 혹은 다층성을 보여준다면, 이 책도 그러한 형식을 발명해보려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모든 개인은 전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이 불확실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을 아파하고 어떻게 연대하고 기릴지 점점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데 존 버거는 소설가이자, 미술비평가, 시인으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의 말처럼, 나는 점점 가속화 되는 불평등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져버리지 않은 채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


관련 링크:

| <불의 절벽> 작품정보  바로가기
| 임민욱 프로필  바로가기
  • 기고자

  • 해민영 _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사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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