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연극계의 새로운 조류, 제로세대
글: 기무라 노리코 (공연예술 기획자)
최근 연극, 영화, 문학, 음악 등 각 예술장르에서 ‘제로세대’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제로세대’란 1906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사이에 태어나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세대를 이르는 말로, 각 장르에서 특정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세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쪽에서는
연극계도 그러하다. 경쾌하고 재치 넘치며 예리한 언어감각으로 희곡뿐 아니라 라디오드라마 대본, 소설, 수필 등을 속속 발표해온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 1970년대에 <아타미살인사건>으로 충격을 불러일으키며 데뷔한 후 일본의 연극씬을 크게 변화시킨 재일극작가 츠카 코헤이(한국명 김봉우) 등 일본 연극계의 두 거장 극작가가 올해 들어 타계하며 일본 연극계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한 듯한 느낌을 줬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제로세대’로 불리는 젊은 연극인의 대두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제로세대’ 연극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5년에 극단 첼피치(Chelfitsch, selfish의 유아적 발음-역주)의 오카다 토시키가 <3월의 5일>로 기시다 쿠니오 희곡상을 수상한 즈음부터다. 기시다 쿠니오 희곡상은 극작가 기시다 쿠니오의 유지를 받들고 젊은 극작가를 육성할 목적으로 1955년부터 운영되고 있는데, 신인극작가의 등용문이자 연극계의 아쿠타가와상(일본의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는 상으로 순수문학 부문의 신인작가에게 수여되는 일본의 대표적 문학상이다-역자주)이라는 별칭을 가진,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희곡상이다. 2007년에는 고탄다단의 마에다 시로의 <살아있는 자, 아무도 없는가>, 2009년에는 모토야 유키코의 <완전 행복, 열라 감사!>, 올해는 극단 마마고토의 시바 유키오가 <우리별>로 이 상을 수상하며 ‘제로세대’ 연극인에 대한 주목도는 더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들 극작가의 수상은 극작가나 연출가의 재능, 혹은 작품에 대한 평가라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일본연극의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반증이다.
이번 글에서는 ‘제로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다섯 명의 젊은 연극인을 소개한다.
▶ 오카다 토시키 / 첼피치 (http://www.chelfitsch.net)
▶ 미우라 다이스케 / 포츠 도루 (http://www.potudo-ru.com) ▶ 마에카와 토모히로 / 이키우메 (http://www.ikiume.jp/keisaijoho.html)
▶ 모토야 유키코 / 극단 모토야유키코(http://www.motoyayukiko.com) ▶ 마에다 시로 / 고탄다단(http://www.uranus.dti.ne.jp/~gotannda) |
‘제로세대’의 연극적 특징 중 하나는, 많든 적든 히라타 오리자(1962년생)의 연극관에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점에 있다. 이들의 작품을 보면 히라타 오리자가 보여줬던 ‘현대구어연극’과 ‘리얼=일상성(조용한 연극)’이라는 이론이, 제로세대 연극인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발전, 그들만의 표현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앙그라연극이 연극의 허구성을 이용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세계의 현실(리얼)을 투영해왔다면 히라타 오리자 이후의 젊은 세대는 ‘리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들이 서 있는 일상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제로세대의 연극이 팝컬처화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로세대’의 많은 연극인들이 연극에만 머물지 않고 소설, 음악,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장르에서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두 명의 일본 연극평론가에게 ‘제로세대’에 대한 의견을 청했다.
평론가인 사사키 아츠시는 “(히라타 오리자 이후의 제로 세대의) 흐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은 연극의 드라마투르기나 감동을 오랫동안 지탱해온 ‘근거 없는 심리’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 전제를 의심하는 데에서 출발하되 그럼에도 연극을 믿으려고 하는 자세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연기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나 연기 위상의 다원화, 발화의 극단적인 이화, 발화와 신체의 분리, 플롯의 유희성/게임성의 과도한 강조, 에피소드의 단편/파편화, 초고차원연극(메타메타연극) 등에서 보듯 극히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그것들은 자칫하면 보이기 위한(그러나 반드시 성공이라고도, 유의미하다고도 생각되지 않을 법한) 형식상의 실험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부터 당연시하고 받아들여 온 심리주의를 배제해도 ‘연극은 이야기이자 허구’라는 명제가 성립할까 하는 과감한 도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연극평론가 니시도 고진 씨는 “세계와 나는 직결되어 있고 그 중간항은 일절 없다, 이것을 속칭 세계계(世界系)라 한다. 제로세대에 유행하는 젊은이들의 생태 중 한 측면이지만 제로세대에 등장한 소극장의 경향과도 어딘가 맞아떨어진다. 그에 반해 세계와 나는 대칭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무수한 갈등과 도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가 개재하는 연극이 있다. 그것을 나는 ‘세계연극’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연상되는 것이 한스 티스 레만이 제창한 ‘포스트드라마 씨어터’다. 레만이 제창한 ‘포스트 드라마’란 종래의 연극을 바꾸기 위한 역사적인 상상력으로 ‘그냥 지금’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 이전의 연극사에 입각한 연극(역사)비판인 것이다. 일견 비슷한 듯한 형상이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제로세대의 연극에 포스트드라마와 같은 과거에 대한 명석하고 지적인 검증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현재의 몸을 통한 반영으로는 두터운 역사를 비판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나아가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연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제로세대의 연극은 이러한 난관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고 평한다.
이렇게 제로세대 연극인들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하지만 연극과 그에 대한 도전에 대해 연극론적으로 회자되는 작품이 적었던 최근의 일본연극계에서 ‘제로세대’를 비평의 대상으로 하여 연극 자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침체되어있던 일본연극계의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제로세대들의 도전은 새로운 연극의 흐름을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