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제,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다
글: 신민경(암스테르담대학교/워릭대학교 석사 과정)
유럽 여름 축제 시즌이 돌아왔다. 그러나 과거 인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느낌을 받는다. 아비뇽으로, 에든버러로 축제 바캉스 계획을 짜는 젊은이들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기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때에 공연장에서 해외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다는 느긋한 생각들이다. 불과 10년 사이에 국제공연예술축제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외국 공연의 희소성 가치가 빠르게 떨어진 것이다.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어단어지만, 그 역사는 길지 않다.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처음 그의 책에서 쓴 신조어를 19세기, ‘국가 간(inter-national)’ 교역이 활발해진 산업계에서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가 생활 전반에서 쓰이기까지 축제의 공헌이 컸다. 유럽에서 두 차례의 큰 전쟁이 남긴 민족 간 갈등과 상처를 극복해보고자, 외국의 문화예술을 초청하는 ‘인터내셔널’ 축제들이 20세기 후반에 창설되었다. 국경을 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축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유럽 도시들은 국제공연예술제를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자산으로 여기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에 ‘인터내셔널리즘(internationalism)’은 현대인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국가나, 도시가 개최하는 행사가 아니더라도, 개인도 여러 방법으로 외국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소셜 미디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생각을 직접 주고받을 수도 있다. 저가항공과 다양한 종류의 여행상품은 사이버세상에서 촉발된 호기심을 현실에서 실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자유로운 글로벌 이민은 민족 간, 국가 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도시에 새로운 문화를 이식하고 있다.
거대한 커뮤니티, EU가 있는 유럽은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어느 권역보다 빠르게 국경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예술가에 대한 지원기준을 국적에서 현재 거주하고, 활동하는 곳으로 옮기면서, 모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노마드 예술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안팎의 변화에 직면한 유럽의 공연예술축제들은 새로운 시대의 ‘인터내셔널’의 의미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대도시의 성공사례: 런던의 리프트, 브뤼셀의 쿤스텐 데자르
지난 7월 18일 막을 내린 런던 인터내셔널 씨어터 페스티벌, 리프트(LIFT)는 가장 급진적으로 기획방향을 선회한 경우이다. 1981년에 창설한 리프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극을 보여주는 축제를 미션으로 삼았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으로서 런던의 리프트에 초청받는 일은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국제공연예술제의 정점에 서 있던 리프트가, 2006년, 축제의 새로운 미션과 기획방식을 발표했다. 변화의 요지는 축제의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을 과거의 외국 공연 프로그래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도시인 런던이 가진 문화다양성을 반영하는 제작 프로덕션들로 담아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리프트의 변화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축제 변화의 역사를 기록한 책, <공연의 변화(Changing the Performance, Julia Rowntree, Routledge, 2006)>에는 예술감독이었던 펜튼(Fenton)과 닐(Neal)이 당시 고민을 회상하는 대목이 있다. 두 사람은 셰익스피어가 연극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외국의 연극을 외면하는 영국 공연계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이 축제를 시작한다. 축제는 20년 동안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만, 90년대에 들어와 축제가 구심점을 잃었다는 것을 느낀다. 종종 축제의 공연들이 런던 시민들에게 그저 ‘이상하고, 이국적인(strange and exotic)’ 경험으로 끝나는 것도 아쉬운 일이었다. 또,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시민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미학적으로 훌륭한 세계 공연의 전시장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실제로 주고받고,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축제로의 전환을 꿈꾸기 시작한다. 리프트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5년 동안 새로운 축제의 모델을 논의하는 예술 포럼(Arts Forum)을 운영하고, 기획자, 예술가, 런던 시민, 정부 관계자, 기업 후원가 등 축제와 관련한 모든 사람들을 초청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6년부터 2년간의 실질적인 준비기간을 거쳐 2008년에 새로운 리프트가 탄생했다.
리프트의 새로운 미션은 런던에 거주하는 다양한 시민들의 국제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연극’을 의미하는 ‘씨어터(Theatre)’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연극성을 수반하는 현대의 모든 퍼포먼스 활동으로 확대했다. 기획에서 가장 큰 변화는 예술감독제를 없애고, 예술가가 주도하는 커뮤니티 참여형태의 공연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예술감독 대신에 세계 각지에서 찾은 16명의 공연 큐레이터(Seeker)를 고용했다. 이들은 극작가, 연출가, 기획자, 배우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자 런던의 특정 커뮤니티(이민자 사회, 동네, 학교 등)와 함께 1년 동안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2008년에 새롭게 선보인 축제는 내용 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지만, 축제 미션을 통일성있게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감독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마크 볼(Mark Ball)이 2009년에 신임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리프트의 새로운 ‘인터내셔널’ 공연예술제의 모색은 그와 함께 현재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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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쿤스텐 페스티벌 웹사이트 |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5월에 열리는 쿤스텐 데자르(Kunsten Festival des Arts)도 대도시가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인터내셔널리즘을 보여준 선구적 축제로 평가받는다. 이 축제는 1994년, 프리 라이슨(Frie Leysen)이 창설했고, 2006년까지 예술감독을 맡았다. 브뤼셀은 서유럽의 중심에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럽연합을 비롯해 여러 세계 기구의 본부가 있는 국제 정치 도시이다. 프리는 세계 정치의 중심지인 브뤼셀과 부합할 수 있는 동시대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국제공연예술제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축제의 포커스를 동시대 사회와 현실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진 젊은 세대 예술가들에게 맞췄다. 창설 당시에는 국제무대에 소개되지 않은 무명의 예술가들로 축제를 만들 수 있을지 모두가 의구심을 가졌다. 게다가, 예술 장르와 형식 파괴 또한 전에 보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너무 급진적인 것 아니냐며 벨기에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독일의 씨어터 드 발트(Theater Der Welt)의 프로그래머로 자리를 옮긴 프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쿤스텐 데자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인정받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쿤스텐 데자르는 형식실험에 갇혔던 현대예술이 동시대의 정치현실과 사회를 다양한 각도와 방법으로 읽어낼 책임이 있다는 각성을 불러 온 선구자적 축제로 평가받는다. 축제를 통해 소개되었던 초기의 이름 없는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장르를 소개한 예술가들로 주목받고 있다. 쿤스텐 데자르는 2006년부터 두 번째 예술감독, 크리스토퍼 슬라뮬더(Christophe Slamuylder)와 함께 새로운 변화를 시험하고 있다.
중소도시의 성공사례: 위트레흐트의 안드 바프
대도시보다 정부 지원이나, 관객 수가 적은 중소 도시의 축제 존폐 위기는 더 심한 편이다. 그 중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의 안드 바프 페스티벌(Festival a/d Werf)은 작은 도시의 ‘지역성’과 ‘인터내셔널리즘’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축제로 평가받는다. 축제의 인터내셔널 프로그래밍의 초점은 아티스트의 국제성과 위트레흐트의 지역성을 연결한 자체 제작 프로덕션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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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레흐트 시, 안드 바프 페스티벌 |
안드 바프 페스티벌은 1986년에 시작해 매년 5월에 위트레흐트 시에서 열리고 있다. 연극, 무용, 퍼포먼스, 설치미술과 심야 야외 락 공연까지 아우르는 위트레흐트 시의 가장 큰 축제이다. 공연장에서 만난 축제감독, 르네(Renée Copraij)는 축제 자체 제작 인터내셔널 프로덕션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제작 시스템은 프로듀싱 씨어터인 하우스 안드 바프(Huis a/d Werf)의 극장 기획팀과 축제 기획팀이 공유하는 한 지붕 두 가족 시스템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장은 축제가 커미션을 의뢰할 예술가 풀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연중, 다양한 국내외 아티스트와 공연초청, 레지던스, 워크숍, 공동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예술가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시간을 갖는다. 극장이 충분히 신뢰가 쌓인 아티스트들을 축제 기획팀에 제안하면, 축제는 위트레흐트라는 도시와 아티스트가 가진 국제성이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르네는 작품의 아이디어 개발, 기획 및 제작은 축제와 예술가가 공동으로 진행한다고 설명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예술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지원하는 게 축제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10년의 축제는 여섯 명의 예술가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네덜란드의 드리 베르오벤(Dries Verhoeven)과 루스 반 거핀(Roos Van Geffen), 런던의 퍼포먼스 작가, 앤 빈(Anne Bean), 포르투갈에서 온 요아오 에반젤리스타(Joao Evangelista),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제임스 베켓(James Beckett), 오스트리아 국적의 연극 연출가이자 프로그래머인 파니 푸테크네흐(Fanni Futterknecht). 국적으로 구분하면, 두 명이 네덜란드 출신이고, 네 명은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여섯 사람 모두 네덜란드에서 짧게 혹은 길게 몇 년씩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글로벌 시대의 아티스트 국제 이동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축제 제작 프로그램은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아티스트의 이질적인 배경이 어떻게 도시의 지역성과 배합되어 위트레흐트와 융화되고 있는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목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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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누가 무엇을 말하는가(WhoSeyWhats)에 수록된 시 |
영국 퍼포먼스 작가, 앤 빈이 작업한 <누가 무엇을 말하는가(WhoSeyWhats)>는 위트레흐트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앤은 위트레흐트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네덜란드어가 아닌, 여러 외국어가 들리는 걸 체험한다. 신기한 경험에 대해 축제기획팀과 이야기하던 그녀는 위트레흐트 시민 85%가 최소 3개 이상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통계에 대해 듣는다. 그리고 도시의 언어와 관련한 퍼포먼스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위트레흐트의 이민자들이 가져 온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어떻게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는지, 거꾸로 사회는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는 것이 앤의 의도였다. 2009년 11월부터 위트레흐트에 살기 시작한 앤은 모국어인 영어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시를 쓰고, 위트레흐트 시민들이 모국어로 자신에 대해 쓴 시를 우편으로 주고받는 캠페인을 시작한다. 시를 보내준 시민은 그의 모국어로 번역된 앤의 시를 받을 수 있었다. 앤은 총 마흔 명의 시민들로부터 20개 다른 언어로 쓴 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시들은 축제 기간 동안, 키네틱 아티스트가 만든 기계로 위트레흐트 시내 보도블럭에 모래로 쓰이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마흔 한 편의 시는 한 권의 작은 시집으로 엮여 축제 기간 동안 무상으로 배포되었다. 시민들의 흑백 사진과 함께 실린 인터뷰에는 다른 언어와 문화에서 찾은 아름다움, 모국어와 네덜란드어 사이에서 겪은 번역과 이해의 어려움 등 보통 사람이 글로벌 시대의 일상에서 발견한 소소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영국에서 온 앤이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발견한 국제성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면, 네덜란드 작가, 드리 베르호벤(Dries Verhoeven)은 거꾸로 인사이더 입장에서 사람들이 인터넷 덕분에 세계와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 작품을 만들었다. 안드 바프 페스티벌과 런던 리프트의 공동제작 프로덕션이었던 드리의 <라이프 스트리밍(Life Streaming)>은 아시아를 덮쳤던 쓰나미 피해를 다룬다는 것 때문에 기획 단계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레스토랑에는 스무 명만이 앉을 수 있는 인터넷 부스가 차려져 있었다. 관객 한 명씩 본인 앞의 컴퓨터에 접속하면, 그 시간에 지구 반대편, 스리랑카에 있는 2004년 쓰나미 피해자들(드리와 2년 동안 작업한 스리랑카 배우들)과의 일대일 채팅창이 열린다. 엄청난 천재지변에서 그들이 당시에 무엇을 잃고, 지금은 무엇을 회복했는지, 현재의 개인적인 일상사까지 묻고 대답한다. 처음에는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던 채팅도 천천히 편해지고, 이 사람의 삶도 그렇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당신이 ‘그’의 삶을 인터넷 채팅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계기가 찾아온다. 물론, 이 순간은 스무 팀의 네덜란드 관객-스리랑카 배우들에게 각기 다른 시점에, 다른 방법으로 찾아온다. 내 경우는 상대방으로부터 “당신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I don''t want your pity)."는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한 시간 여의 채팅이 끝날 무렵, 부스 안으로 조금씩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황한 사이에 물을 발목까지 차 있었다. 그리고 채팅창이 닫힌다. 인터넷이 전달해주는 이미지와 대화들이 정말 우리를 ‘연결’해주고 있을까? 전쟁과 가난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동정을 느낀 다음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이버 세상에서 만난 그 사람들은 실제일까,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이 겪은 이야기와 생각에 대한 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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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트리밍(Life Streaming)/ photo by Zhang Huan |
한국의 도시들이 담아낼 공연예술축제의 ‘국제성’은 무엇일까?
국제 공연예술제의 정체성과 방향에 대한 논의는 한국에도 맞닿아있다. 1990년대, 경제발전과 함께 한국의 공연예술축제의 숫자도 유럽 못지않게 증가했다. 질적인 면도 함께 성장해 외국 공연 관계자들은 장르적, 내용적 다양한 차별성을 띄는 한국 축제계의 다이나믹함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축제 속의 ‘인터내셔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 해외 참여 국가의 수로 축제의 국제성을 평가하는 것은 낡은 방법이다. 또, 글로벌 이주와 이민이 활발한 시대에 아티스트의 출생국적으로 참여국을 구분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유럽 축제들이 ‘국가’에 기반한 낡은 정의인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을 시대에 맞는 새로운 번역으로 옮겨 축제에 담아내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축제들도 무엇이 축제의 ‘국제성’을 만드는지 생각해볼 시점이 되었다. 물론, 이 원고에서 소개한 축제들은 모두 개최하는 곳의 맥락과 정황을 고려한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축제가 성장한 국가와 사회의 토양과 문화적 배경에서 ‘인터내셔널’이 무엇인지 고민한 유럽식 모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공연예술축제의 국제성에 대한 논의에 대한 참고사례 정도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