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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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rtist in Residence, 이하 AIR)가 미술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AIR는 외국기관에 의해 1987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오스트레일리아 카운실(Australia Council)이 호주의 아티스트에게 도쿄에서 체재할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1992년에는 프랑스 정부도 ‘아시아의 빌라 메디치’(Villa Medici)로 도쿄에 빌라 쿠조야마(Villa Kujoyama)를 짓고 매년 본국에서 아티스트를 파견했다. 최근에는 2009년 호주 정부가 에치고 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Echigo-tsumari Art Triennale)에 ‘오스트레일리아 하우스’를 오픈했고 캐나다의 퀘벡주정부 역시 같은 해 도쿄 롯폰기힐즈의 레지던스를 임차, 퀘벡주의 아티스트를 파견하고 있다. 이렇듯 일본의 AIR는 해외 정부에 의한 아티스트 지원이 선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일본의 독자적인 AIR의 시초가 된 것은 1993년에 타마지역의 도쿄도 이관 백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히노데초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사업이다. 이 사업은 초등학교가 있었던 부지에 스튜디오와 주거공간을 갖춘 시설을 설립, 국내외의 아티스트 네 명을 초청해 6개월에 걸쳐 체재하게 한 프로젝트였다. 그 후 오픈한 AIR 시설로는 1998년 개관한 야마구치현의 ‘아키요시다이예술촌’, 2000년 오픈한 아오모리시의 ‘국제예술센터 아오모리’가 있다. 그밖에 1999년에 개관한 후쿠오카시의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2005년에 오픈한 도쿄도의 ‘도쿄원더사이트 아오야마’ 등 일본의 AIR는 지자체의 주도에 의해 발전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NPO 등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AIR프로그램도 늘어나면서 AIR는 일본 각지에서 다양한 장르, 사업, 스타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조사에 따르면 지자체를 포함해 현재 약 30개의 단체가 정기적인 AIR 사업을 통해 국내외에서 아티스트를 공모, 초청하고 창작을 위한 장소나 시간을 제공,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AIR는 1666년 프랑스 왕립아카데미가 로마에 빌라 메디치를 매입, 프랑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로마상’(Prix de Rome)을 수상한 자국의 아티스트들을 유학시킨 데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프로그램은 세계 제일의 예술도시였던 로마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하면서 최첨단의 예술을 접하며 자신의 표현이나 기술을 함양하고 전 유럽에서 모인 지식인이나 왕후귀족과 국제적인 인맥을 쌓는, 미래가 촉망되는 예술가를 키우는 시스템이었다. 타국가나 타문화 속에서의 예술활동은 예술가에게 귀중한 성장의 기회가 된다. 발생단계부터 AIR는 아티스트가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과 장학금을 제공하고 정보나 인적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정보나 사람의 이동이 급격히 가속화된 20세기 후반, 세계 각국에서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등의 대형 국제미술전이 열리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어떤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환경 안에서 의미를 갖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작품이나 설치작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그에 맞는 창작활동 지원 시스템이 요구되었고 AIR는 세계 각지로 확산되게 되었다. 그럼, 무용과 연극장르에 기반해 AIR 사업을 펼치고 있는 단체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 ||
아키요시다이 국제예술촌 _ 야마구치현
아키요시다이 국제예술촌(재단법인 야마구치문화진흥재단 관리)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가 설계했으며 스튜디오, 콘서트홀, 갤러리, 야외극장을 갖춘 메인동과 생활공간이 되는 숙박동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인 공공시설과는 달리 산에 둘러싸이고 마을과 떨어진 곳에 입지,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자체사업으로 신진예술가를 체재하도록 하여 창작활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예술가와 지역이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AIR사업은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장르를 대상으로 하며 ‘레지던스 서포트’와 ‘레지던스 펠로우’ 프로그램으로 나뉘어 있는데, 1998년 개관 시부터 2006년까지 지원한 예술가는 미술 68개 팀, 무용 6개 팀, 사진 3명, 음악 12명, 기타 2명 등이다. [레지던스 서포트] (원칙적으로 2.5개월) [레지던스 펠로우] (1-4주간) | ||
도쿄 원더사이트(T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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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 큐나사카 스튜디오 |
큐나사카 스튜디오(급경사 스튜디오) _ 요코하마
http://kyunasaka.jp/
급경사스튜디오는 요코하마시가 제창하는 ‘문화예술 창조도시정책’을 추진하는 거점의 하나로 공연예술의 창작을 지원하는 환경정비와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폭넓은 예술활동 거점, 지역과 아티스트의 교류 거점을 목표로 2006년에 개관한, 크고 작은 5개의 스튜디오를 보유한 연습시설이다. 운영과 관리는 요코하마시와 NPO법인 아트플랫폼이 하고 있는데, 연극, 무용의 연습실 부족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저렴한 가격으로 장기간 공간을 제공, 창작환경을 정비하고자 한다.
급경사스튜디오는 AIR의 정의를 ‘체재 제작’으로 해석, 세가지 AIR사업을 하고 있다. 첫번째는 스튜디오를 장기(1주일 이상, 최대 2개월)로 이용하는 경우 장기할인을 적용하여 아티스트를 지원함과 동시에 시설을 공연예술 인큐베이터로서 활용하는 사업이다. 두번째는 ‘레지던트 아티스트 제도’로 연습실 무상제공과 우선적 사용을 인정한 특정 아티스트와 공동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업이다. 현재 요코하마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연출가, 무용수 4명이 레지던트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마지막은 ‘급경사 국제교류레지던스 사업’으로 2007년부터 매년 해외에서 아티스트를 초빙, 체재제작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아르헨티나의 연출가, 그리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독일의 리미니 프로토콜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 왔다. 이들 사업은 기본적으로 급경사스튜디오의 디렉터에 의해 아티스트를 선정하며 일반공모는 하지 않는다.
급경사스튜디오의 담당자는 "우리들이 레지던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기존의 AIR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습공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추진해 왔다. 레지던스의 효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장기간 이용하는 아티스트와 시설스태프 간의 신뢰관계가 쌓이고 제작면이나 기술면에서 적절한 서포트를 함으로써 충실한 창작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체재기간 중 워크숍이나 토크세션 등, 창작프로세스를 공개하는 것도 동시대 아티스트나 관객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다양화되고 있는 AIR의 한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예술과 관련한 AIR의 대표적인 예를 소개했는데, 최근 주최단체나 지원단체인 지자체나 기업의 재정난 등 문화예술계 전반의 각종 난제는 AIR사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공연이나 전시 등의 성과발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제작 과정을 중시하며, 지역민과의 체험이나 경험을 공유하는 AIR가 성과가 중시되는 행정적 평가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려워 쉽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AIR를 담당하는 전문적 인력의 육성도 급선무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 중 하나는 지역사회에 밀착한 AIR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티스트가 어느 지역에 거점을 두고 창작활동을 하면서 지역주민과 교류하는 목적의 AIR가 지역문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는 지역에서의 AIR사업을 소개하도록 하겠다.